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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봄비전재복 Jan 19. 2024

*쪼매 쪼잖다

길 잃은 가래떡 (129)


왜 그런 날 있잖은가? 이유도 없이 기분이 처지고 괜시리 화가 나고 누가 슬쩍 건들기라도 하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어제가 그런 날이었다. 전날부터 스산한 겨울비가 조금 내렸고 하늘빛도 마당 끝 저수지의 물빛도 우중충했다.

우울한 기분을 혼자 삭이면서 오전엔 빨래를 해 널고, 간밤에 놓친 잠 때문인지 머리가 무거워서 낮잠을 조금 잤다.


한 시간쯤 자고 나서 톡방을 열었더니, 금방 빼낸 가래떡을 포장하는 사진과 함께 필요한 사람 주문하라는 문자가 떴다.


남편이 가장 좋아하는 가래떡! 마침 잘됐다 싶었다.

말랑하고 쫄깃한 식감, 갓 빼낸 떡이니 온기도 있으리라 생각하며 세 봉지를 주문했다.


무슨 일이고 앞장서서 없는 길도 만들어가는 시낭송모임의 회장님이 말랑한 가래떡까지 소개하고 나섰다. 거침없고 주변을 널리 살피는 그녀의 행보가 늘 고맙다.


나 말고도 주문하는 문자들이 여러 개 떴다.

문제는 배달장소였다. 다른 사람들은 다 시내권 아파트에 가까이 살고 있으니 문제가 없는데, 나는 외곽에 살고 있어서 시내 어느 한 곳을 정해주면 받으러 나가겠다고 문자를 띄웠다.

계좌이체를 하고, 받으러 나갈 장소와 시간을 알려주기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6시 반이 지나도록 아무 연락이 없었다. 바깥은 이미 어둑어둑해지고 있는데...

여기저기 배달을 하느라 늦어져서 그런가 보다. 그리고 혹시 늘 타인의 형편을 헤아리는 회장님이 귀갓길에 우리 집 근처로 지나가며 전해주려고 연락이 없는 건가? 야무진 기대를 했다.(전에 그런 적이 있었으므로.)


늦게 퇴근한 딸과 학원에서 돌아온 손녀까지 늦은 저녁상에 둘러앉았다. 남편이 애정하는 막걸리까지 한 잔씩 곁들여 저녁을 먹는데 다른 분에게서 전화가 왔다.

떡 가져갔느냐고!  이게 무슨 상황? 당신은 받아와서 드시고 계신 모양이었다.

아이구! 꼬여도 단단히 꼬였다.


회장님과 통화하고 어그러진 사연을 알았다. 늦은 시간이지만 가지러 가려했으나 술 한 잔씩 걸쳤으니 나갈 수도 없다.

금방 빼낸 가래떡 하나씩 들고 맛나게 먹으리라 생각했는데, 누구보다 좋아하며 기다린 남편의 기대도 무너져버렸다.


내일 아침에나 가지러 가겠노라 연락해 달라는 당부를 해놓고, 중간 도착지에 남아있을 내 몫의 떡 꾸러미생각에 속이 상했다.




오늘 아침~ 남의 상가에 너무 일찍  갈 수 없어서 9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다.

9시 30분 지나서야 맡겨두었다는 서점에 가서 떡을 찾아왔다.


집에 가져와서 꾸러미를 풀었다.

아직 못 먹을 정도로 딱딱하게 굳지는 않았지만, 밤새 상자에 담겨 상가바닥에서 밤을 지새우느라 차갑게 식어버렸다. 겉은 조금 마른 듯 굳어서 그냥 먹자고 내놓을 수 없었다.

말랑한 채로 받았다면 동네 부녀회장에게 한 꾸러미 주려고 했는데...!


두어 개 훈짐을 들여서 남편에게 내놓았지만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

어떤 일이건 타이밍이 중요한데...


별것도 아닌 이런 작은 일에 속상해하는 내가 마뜩잖다. 쪼매 쪼잖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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