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인심이 그렇다(225)
백릉 채만식선생의 75주기 추모제가 6월 7일 있었다.
그는 1950년 6월 11일에 상여도 꾸리지 못한 채 그의 유언대로 리어카에 실려 고향 임피 산자락에 버려지듯 묻혔다 한다.
그의 유언대로 들꽃으로나 가득 덮어서 마지막 길을 보내드렸는지 알 수 없으나, 75주기를 맞는 올해도 쓸쓸한 행색은 별반 나아진 것 같지 않다.
시민단체로 출발했으나 앞장선 사람의 종교가 문제가 되어서 시작부터 많이 덜컹거렸다.
채만식문학의 부활을 꿈꾸는 그의 열정이 흑과 백처럼, 파랑과 빨강처럼, 높은 벽을 만나고 거친 파고 앞에서 뛰어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어쨌거나 6월 7일 오전 11시에는 채만식 작가의 묘소를 찾아 참배하고 추모제를 지냈다, 옥구향교에서 전교님과 유도회장님 등이 의관과 축문까지 준비해 가셨다 한다. 흔히 볼 수 없는 전통 제례의식을 시연하는 자리였기에 배석한 사람들과 마을주민들에게도 특별한 구경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나는 다른 중요한 선약이 있어서 묘소 참배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마을 사람들도 한목소리로 다 허물어진 생가터와 집필실 등을 복원하고, 지자쳬 등에서 많은 관심과 지원을 바란다고 전했다.
그리고 오후 2시 월명공원 안에 있는 채만식문학비 앞에서 간소한 추모와 문학제가 있었다.
트럼펫연주로 울려 퍼진 진혼곡, 시낭송 '민족의 죄인', 1인극 '제향날', 살풀이 춤, 기타 연주와 노래, 팬플루트연주 등 제법 구색을 갖췄다.
더 많은 문인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아쉬움이 컸다.
왜 사람들은 늘 나만 옳고 너는 그르다고 생각하는 걸까?
합쳐질 수 없는 표면상의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지만, 또 다른 숨겨진 이유가 있는 건 아닌지 옆에서 지켜보기 불편하다.
지자체 대표의 선거철이 가까워서 그런지 평소 같으면 근접하기 어려운 비탈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올라와준 모모한 인사들도 몇 있었다. 애당초 행사가 목적이 아니라 그곳에 모인 표를 계산한 걸음이었기에 행사 시작도 전에 인사말만 남기고 다음 장소로 훨훨 날아갔다.
세상 인심이 그런 것 같다.
혹여 자기에게 불똥이라도 튈까 봐, 행여 불이익이 갈까 봐 글을 읽고 '좋아요" 한 번 누르는 것도 눈치가 뵈는가 보다.
하기사 국경일이나 기념일에 태극기를 다는 것도 눈치를 본다는데 더 할 말이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