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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숲, 비와 푸르름에 빠지다

기픈시 스물여섯 번째 출간(226)

by 봄비전재복


백제의 여인들! 아득한 혈맥을 이었으리.

한강이 남으로 흘러 공주산성을 휘돌고 부여백마강에 이르러선 꽃처럼 떨어져 丹心을 그렸으니 낙화암이라 일렀더라.

금강으로 받아 안고 유유히 흘러 빛고을까지 뿌리 뻗어 영산강에 다다랐다.

패망한 왕조의 백성, 오랜 세월 숨죽여 살았던 백제의 이름 없는 여인들이 하나, 둘... 서로 알아보고 詩로 뜻을 모아 온 지 어느새 스물 일곱 해!

<기픈시>라는 야물찬 시의 집을 또 한 채 지었다. 제26 시집이니 해마다 한 채씩 스물여섯 해가 지났다는 뜻이다. 매해 한 가지 주제를 선정하고 연말까지 작품을 모아서 책을 만들어왔다.

그리고 춥지도 덥지도 않은 5월쯤에 전국을 유람 삼아 돌며 출간기념 간담회를 가져왔다.

서울, 경기, 대전, 충주, 군산, 서천, 광주, 휴전선 가까이 까지 올라가기도 하며 우의를 다지고 시의 혼을 밝혀왔다.

그 중심에는 지금도 왕성한 창작과 집필활동으로 후진양성의 선두에 서계시는 이향아시인(1938년~)이 계신다.

그동안 기픈시를 거쳐간 수많은 이름들이 있었으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나라 밖으로, 세상 밖으로, 지병으로... 피치 못할 사정으로 이제 열 명 안팎의 단출한 식구가 남았다. 그래서 더 애틋하고 정답다.


올해는 조금 늦게 6월 20일~21일, 전남 화순 '하늘정원'이라는 독채펜션을 얻어서 1박 2일을 함께 했다.

서울, 수원, 군산, 무안, 광주에서 출발한 회원들은 일단 광주 터미널에서 만나고, 렌트한 차로 숙박지인 화순으로 향했다.

하필 금, 토 양일간 전국적으로 비가 예보되었고, 특히 서해 남부는 곳에 따라 국지적으로 집중호우도 내릴 거라 했다.


10시 40분 군산에서 출발할 때부터 하늘은 비구름이 가득하고 광주로 가는 도중 비가 시작되었다.

오후 3시쯤 광주 버스터미널에서 서울(2), 군산(3), 무안(1)에서 모인 여섯 명은 먼저 렌트한 차로 숙박지인 화순 하늘정원펜션으로 출발했다.

광주에 사는 다른 회원은 서울에서 볼일을 마치고 저녁식사 후에 숙소로 합류하기로 했다.


빗물에 젖은 6월의 산과 들은 그야말로 환상적이었다.

차를 렌트하여 운전을 해주는 란희총무님께는 빗길 운전이 미안했지만 편하게 실려가는 나는 너무 좋았다.

창밖으로 흐르는 6월의 산과 숲, 들판은 온통 물감의 농담이 다른 초록의 물결이었다.

운무에 가렸다가 슬쩍슬쩍 모습을 드러내는 산그리메 하며 물기 머금은 나무들, 제법 키가 자라서 푸르게 채워지는 모낸 들판의 풍요에 가슴이 마구 벅차올랐다.


광주에서 두 시간쯤(나중에 들어보니 실제로는 그렇게 먼거리는 아니었다고 한다. 내 느낌이 그랬나 보다.)달려서 숙소에 도착했다.

와! 너무 아름다웠다.

앞에 저수지를 바라보고 산자락에 독립적으로 지어진 독채 펜션.

비까지 내리니 운치가 끝내준다.

방 2, 화장실 2, 넓은 거실과 다용도실, 제법 넓은 베란다와 작은 수영장까지 갖춰있다.


평지보다 약간 높은 곳에 있는 숙소에서 내다본 풍경


짐을 놓고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갔다. 근처에 식당이 있다고 했지만, 총무님의 친동생이 차로 반 시간쯤 거리에서 유명한 맛집을 운영하는데, 그곳에서 저녁을 산다고 했다. 여러모로 수고하는데 저녁식사까지 내겠다니 고맙고 미안했다.

1500여 평의 대지에 예쁘게 가꿔진 나무들이 시선을 끄는 멋스러운 가든, 건물 외관이나 실내도 고급스러운 자재로 지어져 있었다.

맛있는 남도의 쇠고기버섯전골로

배불리 식사를 하고, 옆에 별도로 꾸며진 예쁜 티룸에서 차와 간식을 먹고 마시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어두워지기 전에 숙소로 돌아와 모두 편한 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서울에서 일을 보고 오는 광주의 한 회원은 남편이 데려다주며 큼지막한 수박 한 통을 놓고 가셨다. 저녁식사 후의 환담시간을 더욱 달콤 시원하게 해 준 광주의 허갑순시인, 둘째 날 간단한 조식 후 광주로 나와서 푸짐한 점심까지 샀다.

이것이 남도의 후덕한 인심이다.



올해는 <얼굴>을 주제로 한 시가 각각 다섯 편씩이다. 작품이 실린 차례대로 한 편씩을 낭독하고, 시와 관련된 이야기, 또는 못 본 동안의 사는 이야기 등을 나눴다.

작품의 강평은 이향아시인께서 짚어 주셨다.

변방의 이름 없는 우리가 무슨 복으로 이렇듯 훌륭한 시인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를 논하고 짧게나마 평을 받고 귀한 말씀을 들을 수 있는지! 참 감사한 일이다.

밤이 깊어질수록 창 밖의 빗소리는 무리를 지어 작은북을 신나게 두드렸다. 우리는 늦도록 쾌적한 숙소 깨끗한 침구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시간을 누렸다.


뒤척임 없는 숙면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하나 같은 수면소감

"참 자알 잤어요."였다.



[이목구비야 정연하지 않아도 된다. 얼굴에는 인격이라는 향기가 있고, 충직한 표정이 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안색으로 다가온다. 아무쪼록 얼굴을 구기지 말고 살아가야지. 아무쪼록 내 얼굴에. 먹칠하는 일은 저지르지 말고 살아가야지. 매일 아침 맑은 물로 씻어서 양심을 더 양심껏 고백해야지. 드맑은 미소로 감싸서 이제는 끝없이. 끄덕이면서 끄덕이면서 살아가야지.] 제26집 서문 중에서/ 이향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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