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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Sep 27. 2023

옷은 많을 필요가 없다

나는 옷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TV에 나오는 혼자 사는 연예인들은 자기만의 옷방이 따로 차려져 있는데 내 옷은 옷장 한 칸을 차지할 뿐이었다. 그런 내가 겨울 옷을 넣고 봄옷을 꺼내는 시점마다 아내의 잔소리를 들었다. 달랑 몇 개밖에 없는 옷을 이번 겨울에 안 입었다고 버리라는 아내의 권유가 잔소리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아내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무마하다가 옷방 붙박이 옷장 앞의 조립식 봉 형태의 옷걸이가 무너지는 일이 발생했다. 걸어두던 자주 입던 옷들은 바닥에 널브러졌다. 봉을 다시 조립해도 헐거워 금방 무너질 듯 위태했다. 다 분해해서 버리기로 하였다.


방의 1/3을 사용하던 옷걸이 봉들이 사라지자 방이 넓어졌다. 다만 오갈 데 없어진 옷들은 붙박이 장으로 들어가야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내 옷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꽉꽉 들어차서 더 이상 들어가지 못하는 상태인데도 걸어야 할 옷은 한참 남았다. 아내가 또 한마디 했다.

"안 입는 옷은 좀 버려요!"

"내 옷도 내 옷이지만 선생님 옷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내 옷 중에 이만큼은 버릴 거예요. 신랑 옷도 버리세요."


아내가 버리려고 출입구에 쌓아 놓은 옷들이 한 보따리였다. 아내는 이럴 때는 과감했다. 아직 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내 옷들도 한 보따리인데 버릴 게 하나도 없었다. 아내는 버리는 자기 옷 중 쓸만한 것은 재활용 의류 박스에 넣고 낡은 것은 모두 쓰레기 봉지에 넣었다.


나는 옷을 버리는 대신에 옷장을 사는 쪽으로 아내를 설득했다.

"옷걸이가 없어지고 나니 옷 걸 공간이 부족하네요. 아이들도 크고 옷 넣을 곳은 어차피 필요하니 옷걸이 있던 공간에 놓을 옷장하나 보러 갑시다."

평소에 아내도 늘어가는 아이들 옷을 넣어 둘 공간을 생각하고 있었기에 주말에 놀러도 갈 겸 IKEA로 향했다.


매장의 가구들은 대부분 조립형이었지만 생각보다 가격이 꽤 나갔다. 예쁜 옷장을 몇 개 봐두었는데 아내는 되도록 아무 꾸밈없이 단순한 옷장을 찾았다. 이건 너무 큰 것 같고, 이건 우리 집 분위기와 잘 안 어울리고, 여러 가지 이유로 옷장을 단박에 고를 수 없어서 그날은 구경만 하고 빈손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또 며칠이 지나갔다. 아직 옷걸이에 걸리지 못하고 옷 장 아래 며칠째 처박힌 옷들을 보면서 아내에게 물었다.

"옷 버리고 나니 허전하진 않아요?"

"이삼 년 안 입은 옷은 어차피 다음에도 안 입어요. 신랑도 입는 옷만 입던데 나머진 다 버려요."


사실 옷장에 걸린 옷 중에서 내가 자주 입는 옷은 몇 벌 없었다. 계절이 바뀌고 옷장을 정리할 때 눈에 보여 찍어놓은 옷은 입고 다니는데 그때 보이지 않았거나 상자 속에 들어가 있는 옷은 몇 년을 있는지도 모르고 살기도 했다.


인터넷 쇼핑몰을 기웃거리며 옷장을 찾아봐도 딱 마음에 드는 게 없었다. 또한 가구라서 그런지 가격도 만만치 않았다. 싸도 50만 원, 괜찮으면 100만 원이었다. 안 입는 옷을 버리고 입는 옷만 보관하면 옷장을 살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조금씩 커져갔다. 쉽게 100만 원을 버는 일이었다.


'그래, 아내가 옷을 그렇게나 버렸는데도 입을 옷이 없진 않네. 나도 아깝지만 3년 정도 안 입은 옷들은 다 버려보자!'


옷걸이에 걸린 옷과 처박아놓은 옷, 상자에 있는 옷, 다른 옷칸에 섞여 있던 옷을 전부 꺼내서 안 입는 옷을 골라냈다. 십 년 만에 만나는 추억의 옷, 이제는 내 허리에 안 맞는 옷, 때가 타서 더 이상 하얘지지 않는 옷들이 점점 쌓여갔다. 그렇게 한 보따리가 쌓였고 얼마 전 아내가 했던 것처럼 분리해서 버렸다.


조금 빽빽한 감은 있지만 붙박이장을 채울 만큼의 옷만 남았다. 그렇게 1년이 지나도 불편함이 없었다. 새로 옷을 살일도 없었다. 양복이 근무복이라 평상복은 몇 개 없어도 돌려가며 입으면 되었다. 그 양복도 겨울을 제외하면 와이셔츠에 바지만 입는 단출한 복장으로 다니기에 흔히 마이라고 불리는 자리를 많이 차지하고 무거운 재킷도 한두 개면 되었다.


다만 와이셔츠는 매일 다른 것을 갈아입는데 양복바지는 입는 것만 입는 일이 반복되었다. 며칠 전에는 이번 여름 내내 입은 바지의 엉덩이 부분 실이 뜯어지려 해 빨래방에서 수선하였다. 그걸 수선한다고 다른 바지를 꺼냈는데 2년째 입지 않았던 거라 몸에 안 맞는지 하루 입고 나니 허벅지 안쪽이 뜯어졌다. 또 옷장을 뒤져 찾아낸 바지는 허리가 타이트했다. 그래도 입는 데는 문제가 없어 며칠 입었는데 지난 일요일에 장례식장을 방문해서 자리에 앉다가 엉덩이 부분이 찢어졌다. 당황스럽기보다는 웃음이 났다. 

'하늘이 양복바지를 골고루 입으라며 안 입던 옷을 꺼내게 하고 낡은 옷은 스스로 버리게 하는구나!'


이제 다시 계절이 바뀌며 여름옷들을 정리해서 옷상자에 넣고 가을과 겨울 옷을 꺼내어 옷걸이에 건다. 익숙한 옷들을 하나씩 꺼내며 안 입어서 버리는 옷이 없도록 골고루 입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년 봄에는 아내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안 맞고 낡은 옷은 이미 다 버렸고요. 여기 있는 옷은 다 자주 입고 다녔어요. 잘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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