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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Jbenitora Nov 01. 2023

성격은 어디 가지 않는다

최근에 일이 몰려 주말에 아이들을 부모님 댁에서 놀게 했다. 실내외를 가리지 않고 활발하게 뛰어노는 첫째에다 형아를 보고 따라 하려는 둘째까지 부모님께서 보신다고 수고를 많이 하셨다. 마침 저번주 일요일에는 부모님께서 볼일이 있으시고 우리 부부도 밀린 일을 어느 정도 처리했기에 아이들과 나들이를 가기로 했다. 


나들이 장소는 국립부산과학관으로 정했다. 바로 인근에 아웃렛이 있어서 나올 때 잠깐 들러서 아이들 겨울옷을 사기에 동선이 좋았다. 얼마 전 울산에서 서창을 거쳐 부산 노포동까지 연결된 자동차전용도로가 완전히 개통되어 접근성이 더 좋아졌다. 우리는 신나게 달려 1시간도 지나지 않아 과학관에 도착했다.


 드문드문 비어있는 주차장 한편에 차를 세우고 입구로 이동했다. 마침 '한국재료연구원 특별전'이라는 행사가 열려 무료로 입장할 수 있었다. 넓은 과학관 마당에는 재활용 부품으로 만든 깡통자동차, 미사일, 탱크 등 다양한 전시물이 있었다. 아이들이 보고 타고 느낄 수 있는 좋은 전시였지만 막상 아이들의 시선은 야외 놀이터에 꽂혔다.


아내가 아이들이 참여할 만한 프로그램이 있는지 바깥에 설치된 부스들을 돌아보러 간사이 첫째가 집라인을 탔다. 그러자 둘째도 작은 체구로 집라인을 잡고 매달렸다. 아이가 떨어질까 안다시피 해서 한번 태우고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첫째가 그 옆에 있던 미끄럼틀로 뛰었고 덩달아 둘째도 뛰었다. 과학관 실내로 들어가서 평소 접하지 못하는 기구들을 가지고 놀았으면 싶은 아빠의 기대와 달리 아이들은 여기 아니라도 흔히 볼 수 있는 놀이터에 더 신나 했다.

'일전에 첫째를 데리고 고성에 놀러 갔을 때도 공룡전시물보다는 놀이터에서 노는 걸 더 즐거워했지.'


아이들은 어디가 되었든 상관없이 노는 것만으로도 행복해했다. 첫째가 잡기놀이를 하자고 하였다. 첫째와 놀면 둘째에게 시선을 둘 수 없어서 엄마가 오면 놀자고 설득했다. 5분쯤 뒤 아내가 돌아왔다.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를 하는 게 별로 당기지는 않았지만 첫째의 성화에 둘째를 아내에게 맡기고 잡으러 가기로 했다. 놀이터 밖으로 나가지 않는다는 약속을 받고 아이를 잡기 시작했다. 첫째가 신나서 도망갔다. 놀이터에는 첫째와 비슷한 또래의 다른 아이도 하나 있었는데 우리가 노는 걸 보더니 자기도 잡아달라고 했다. 혼자 놀고 있는 것 같았다. 


'당장 내 애와 술래잡기도 내키지 않은데 다른 애와도 놀아줘야 하나?' 하다가 '부모가 어디 갔는지 모르겠지만 얘도 얼마나 심심하면 나에게 놀아달라고 할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아저씨가 너도 잡으러 갈까?"

"네"

"10초 세고 잡으러 간다. 10, 9... 1, 0.  이 녀석들 어디 갔냐?"


첫째가 날쌔게 미끄럼틀로 올라가자 가까이 있는 다른 아이를 잡으러 다가갔다. 

"여기 있네. 잡아버려야겠다. 얍~"


깔깔대며 도망치다가 서너 발자국 앞에 있는 나를 발견한 그 아이는 뒤돌아 도망가려고 했다. 그러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넘어졌다. 바닥은 우레탄이었고 아이는 청바지를 입고 있었다. 나는 당연히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고 아이를 지켜보았다. 왜냐면 아이가 아까 자기 혼자 놀이터를 뛰며 놀 때 이거보다 심하게 넘어지고도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는 걸 봤기 때문이었다. 아이는 뒤돌아 앉더니 울기 시작했다. 


'이게 울 일인가?'

다친 곳은 전혀 없었다. 놀라서 우는 것 같았다. 아이는 울면서 놀이터 한편을 슬쩍슬쩍 보는 듯했다. 나는 전혀 생각지 못한 현 상황에 당황해서 "괜찮니?"라고 물어보고는 어찌할지 모르고 아이를 보고 서있었다. 


'울음을 멈추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일으켜 세우거나 달래야 하나?'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눈매가 사나워 보이고 덩치가 좀 있는 아이의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걸어왔다. 놀이터 구석 기둥에 서서 지금까지 상황을 지켜본듯했다.


"어서 일어나. 울지 말고"

나는 그 사람이 아이에게 하는 얘기를 듣고 이 일이 수습될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순진한 생각이었다. 그 애의 아빠는 그러고는 나를 꼬나보고 얘기했다.


"아니, 아를 와 넘어지게 하요? 와 울리는 거요? "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애 앞이라 체면에 하는 말이겠지라고 생각했다. 나는 우는 아이에게 다가가 다시 한번 괜찮냐 물으며 일으켜 세웠다. 애는 울음을 그쳤다.


"애가 저를 피해 도망치다가 넘어진 거 같네요."

"그래, 와 아를 잡을라고 하요? 당신 때문에 넘어진 거 아니요?"

"아니 그쪽도 애가 저보고 잡아달라 하는 거 보셨잖아요."

"아가 잡아달라 한다고 잡으러 가는교?"

"아이가 같이 놀자고 하니까 제 딴에는 놀아주려고 한 거잖아요."

"아를 울려놓고 말이야. 쳐다만 보고 있고... 내가 오니까 일으키는 척하고.. 어!"


점점 이 사람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기 시작했다. 그 사람은 선의로 아이와 놀아주는 사람을 마치 아이를 괴롭힌 악인으로 몰아갔다. 


"내가 당신 애를 민 것도 아니고 자기가 놀라서 넘어진 게 내 잘못입니까?"

"그럼 왜 아를 보고 잡니마니 소리쳤는교? 그거 때문에 놀라서 넘어진 거 아니요."

"아까 보니까 애 혼자서도 놀이터 돌아다니며 넘어지더만요. 그때도 당신은 와보지도 않던데... 지금은 왜 이렇게 흥분합니까? 내가 애를 해치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괜히 애를 생각하는 선한 마음으로 놀다가 악한으로 몰리니 황당하면서 짜증이 났다.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느낌이었다. 점점 소리가 커지자 사람들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놀이터 바로 옆에서 사회자가 행인을 대상으로 무언가 이벤트를 하고 있었는데 우리의 말싸움이 이벤트 진행을 방해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몰려들자 그 사람은 앞뒤 다 자르고 내가 애를 울렸다고 얘기했다.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왔다. 

'이런 인간은 인격적인 대우가 필요 없다.'


소싯적에 콜센터에서 진상고객을 대면하는 민원업무를 담당한 적이 있었다. 자기 잘못임에도 따져 들고 전화 응대하는 죄 없는 여직원들에게 자신이 고객이라는 이유로 갑질하며 쌍욕을 퍼붓는 사람을 여럿 상대했다. 대부분은 남자직원이 나와서 이성적으로 얘기하면 화를 가라앉히고 협상에 응했다. 그러나 일부는 덮어놓고 쌍욕을 퍼부으면서 깽판을 쳤다. 그때 나는 인간이라고 전부 인간적인 대우를 받을 만하지는 않다는 걸 알게 되었다.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사람이 뭐가 어쩌고 어째! 니가 니 애랑 안 놀아주니까 애가 나보고 놀아달란 거 아니야! 애 넘어지는 거 너도 봤잖아! 내가 밀더나! 이 xx가! 내가 만만해 보이나!"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 따졌다. 그는 더 이상 얘기가 통하는 상대가 아니었다. 자기 입장만 내세우는 꼰대일 뿐이었다.


우리의 말싸움은 행사 관계자들이 서로를 떼어놓자 끝이 났다. 분이 풀리지 않는 나는 계속 그에게 따져 들고 싶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내 목소리가 다른 사람들에게 폐가 되고 있었다. 아내의 재촉으로 둘째를 안고 첫째 손을 잡고 실내전시관으로 들어갔다. 화는 시간이 지나니 풀렸고 나는 좀 전에 안 좋은 모습을 보인 것을 만회하기 위해 아이들과 더 적극적으로 놀아주었다.


이후에 혼자 곰곰이 이 사건을 돌이켜보았다.

'내가 그 아이의 아빠라면 어떻게 했을까?'

평소 내 양육철학이라면 "일어나라! 아빠가 보니까 울 것도 아니네. 니가 울면 니하고 놀아주던 아저씨 입장이 뭐가 되겠니?"라고 말을 했을 것이었다.


내가 생각하는 반응과 정반대의 반응이 오니까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든 것이었다. 세상은 다 내 맘과 같지 않은데 '요즘 내가 세상 무서운 것을 모르고 살았나?' 싶었다. 그러면서 씁쓸한 미소가 지어졌다.

'내 성격이 다 죽은 줄 알았는데 아직도 남아있었네.'


내가 그토록 고치고 싶어 하던, 화가 나면 고함을 지르고 침착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성격이 변하지 않은걸 알게 되었다. 정말 무서운 사람은 남들이 흥분할 때 차분할 수 있는 사람인데 나는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미소가 나온 이유였다. 


'언제쯤 이런 일에 차분하고 이성적으로 대응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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