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경주벚꽃마라톤
올해 벚꽃은 결국 예년보다 사흘정도 빨리 피었다. 얼마 전까지도 대중매체에서는 열흘은 일찍 필 것이라는 설레발을 피웠다. 벚꽃축제를 일주일씩 당겨서 잡은 각 지자체들은 벚꽃 없는 벚꽃축제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겨울에 경주 벚꽃 마라톤 참여를 결정할 때만 해도 벚꽃이 다 지고 나서 열리는 것이 아닐까란 생각을 했다. 신청 홈페이지는 마련되어 있었지만 아직 사은품조차 정해지지 않아서 더 못 미더웠다.
접수한 걸 잊고 있던 3월의 어느 날 T셔츠와 관절 밴드, 스틱형 갈증해소분말, 배번호가 집으로 배달되었다. 고작 10km이지만 대비가 필요했다.
중국발 황사가 시작되었다. 비가 왔다가 개었다가 날씨도 협조를 해주지 않았다. 가뜩이나 게으른 몸이 핑계를 찾으니 새벽 조깅은 다른 사람 이야기였다.
'하프마라톤도 아니고 10km 마라톤인데 어떻게든 되겠지!'
4월이 되었다. 성큼 다가온 마라톤이지만 연습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다. 대회 하루 전인 4월 5일에는 꼭 조깅을 하기로 했다. 국회위원 선거 사전 투표소가 차로 5분 거리에 있기 때문이었다. 차를 타지 않고 뛰어 왕복하면 그것이 연습이었다.
그렇게 새벽 6시에 맞춰 투표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4km 정도 거리를 약 30분 뛰었다. 가벼운 조깅이라 무리가 안될 줄 알았는데 하루종일 몸이 제법 피곤했다. 3월 초에 1km, 2km씩 뛰긴 했어도 꾸준히 뛰지 않다 보니 몸이 운동을 안 하던 때로 돌아가 있었다. 퇴근하고 일찍 눈을 붙였다.
새벽 5시 반에 눈을 떴다. 아내와 아이들을 챙겨 집을 나섰다. 아내는 마라톤을 뛰고 나면 내가 운전하기 힘들까 봐 동행을 자처했다. 오전 7시 40분의 마라톤 출발장소는 차들과 사람으로 빽빽했다. 차량통제가 이뤄지고 있어 차를 멀찍이 대놓고 대회장으로 갔다. 참여선수와 그 동행들을 합해 1만명은 가볍게 넘어 보였다.
늘 그랬듯 휴대폰을 슬링백에 넣고 등에 매었다. 아내가 공연장 주변에서 아이들과 노는 동안 출발선으로 향했다. 하프 선수들이 8시에 맞춰 먼저 출발하고 10분 뒤에 10km 참가자들도 출발했다.
사회자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기분 좋게 출발했다. 초반 1km는 인파에 치이느라 걷는 거나 뛰는 거나 별 차이가 없을 정도였다. 속도를 내려면 그 사람들 사이를 비집고 앞으로 치고 나가야 하는데 기록 욕심이 없어 무리 중에 섞여 있는 것을 택했다.
10km 코스는 벚꽃 가로수 사이를 뛰는 환상적인 경험이었다. 꽃이 만개한 보문호수를 한 바퀴 도는 코스가 해외에서도 유명한지 대만에서 온 러닝크루들도 보였다. 그들은 뛰다가 예쁜 풍광이 나오면 멈춰 서서 사진을 남기고 있었다. 나도 슬링백을 몇 번을 뒤적여 스마트폰을 꺼내 촬영을 하고 다시 넣느라 바빴다. 곳곳에 예쁜 곳이 보였다. 따가운 봄햇살은 구름에 숨어 햇볕 걱정이 없었으며 황사도 미세먼지도 양호한 날이었다.
5km 지점을 지나 보문호수를 반쯤 도니 급수대가 있었다. 오르막이 시작되는 곳이었다. 힘든 코스를 앞두고 물을 한잔 마시려 하니 급수대 주변에 사람들이 벌떼처럼 몰려 있었다. 뛰는 것을 멈추고 잠시 걸어가서 목을 축이고 다시 뛰었다.
'절반 이상을 뛰었는데도 사람들이 이렇게 많지?'
작년 태화강 국제 마라톤 때도 사람이 많았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게다가 그땐 하프마라톤이었다. 당시에는 5km 지나고 나서는 나와 비슷한 속도의 몇몇 경쟁자들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규모가 다르고 뛰는 코스가 다르니 보이는 것이 인파요 밟히는 것이 사람이었다.
7km 지점이 되자 오른쪽 무릎에서 이상신호가 왔다. 연습을 충분히 했을 때는 하프를 뛰어도 오지 않던 신호였다.
'꾸준히 운동하지 않으니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수많은 인파들 중에서도 몇몇 속도가 맞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이 전부 앞서 나갔다. 뒤쳐지고는 있지만 내 계획에 따르면 1km 남기고 스퍼트를 내면 다 따라잡을 수 있는 간격이었다.
드디어 9km 지점이 나타났다. 계획대로 속도를 점점 올리며 성큼성큼 뛰었다. 10초도 되지 않아 오른쪽 무릎의 경고가 날아왔다. 이대로는 얼마 못 가서 뛰기는커녕 걷는 것도 절뚝거릴 판이었다. 바로 속도를 낮췄다. 막판 스퍼트는 체력이 아니라 관절문제로 좌절되었다.
최종 성적 1시간 3분 24초
10년 전 성적이 58분대였으니 5분 정도 느려졌다. 아쉽긴 했지만 완주만 하라던 아내의 잘했다는 칭찬에 기분이 좋아졌다. 몸에 큰 무리 없이 무사히 경기를 마친 것과 벚꽃길을 원 없이 만끽한 것만 해도 감사가 차고 넘쳤다. 완주 메달은 첫째의 목에 걸어주었다.
나눠주는 국수와 간식을 먹고 길가에 세워둔 차로 향했다. 가는 길에 벚꽃이 날렸다. 아이들은 떨어지는 벚꽃 잎을 잡으며 소원을 빌었다. 길가에 세워둔 차를 타고 대회장 주변 1킬로미터를 이동하는 데 30분이 넘게 걸렸다. 어렵사리 보문단지를 빠져나오는데 반대편 차선은 들어오는 차량들이 밀려서 꽉 막혀있었다.
그동안 벚꽃시즌에 경주 보문단지를 산책을 하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거나 삼륜차도 빌려 타 보았다. 전부 좋았지만 이번 벚꽃 속 1시간 달리기는 선물 같은 경험이었다. 꾸준한 달리기 습관이 뒷받혀 주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그건 다음 대회 때로 넘겨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