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2년 하고도 4개월 차가 된 나에겐 이곳은 향후 책으로 나올 삶에 대한 진솔한 기록의 창고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대의 흐름에 영합하는 주제나 독자의 관심사보다는 나의 의식의 흐름이나 깨달음에 충실하다. 구독자가 느냐 주냐는 아무 상관이 없고 내 글을 읽어 주는 분들이 계신 것만으로 감사하다.
일상의 언어로 일상의 이야기를 쓰는 에세이스트로서 다른 형태의 글을 쓰는 사람들이 궁금했다. 수필도 제대로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정신을 파냐고 말을 할 수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난 직업인 경영지도사 하나만 파기에도 시간이 없는 사람일 것이었다. 취미로 쓰는 글이지만 다양한 관점에서 글을 써보는 것은 도전하고 싶은 일이었다.
책을 반납하러 도서관에 가서 다음 책으로 사람들이 많이 읽는 소설 두 개를 골랐다. 매번 읽는 자기 계발서나 성공과 철학 관련 책은 한 타임 쉬어가기로 했다. 탐미주의 소설의 최고봉이라는 '금각사'와 국민도서나 다름없는 '데미안'을 들고 집으로 올 때만 해도 기대에 부풀었다. 이 책들만 읽으면 작가의 생각과 글 기술이 내 것이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책을 반납해야 하는 시간은 어느 때처럼 빨리 다가왔다. 2주가 지났지만 두 소설 모두 첫 부분 10page를 넘기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 계발서는 제 아무리 두꺼워도 3일이면 읽을 수 있는데 소설은 그게 안되었다. 워낙 안 읽어 보기도 했고 소설이 내 습관이나 인생을 바꿔 줄 것이라는 기대도 적었다.
중학교 때 엘런폴섬의 '모레'나 김용의 '신조협려',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와 같은 소설을 신나게 읽은 적이 있었다. 반전 있는 추리결과, 주인공의 성장, 전략가의 신출귀몰한 작전은 청소년 시기의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맞물려 책을 손에서 뗄 수 없게 하였다. 나이가 든 지금은 세상의 호기심은 사라지고 지루함이 자리 잡았다. 어떤 소설을 펴더라도 그저 내가 사는 삶의 범위 안에서 예상가능한 이야기였다. 게다가 꾸며진 거짓이야기라는 생각에 왠지 모를 거부감이 들었다. 아까운 시간을 남이 꾸민 이야기나 보며 허비하는 느낌이었다. 금각사와 데미안도 소설에 대한 나의 편견의 벽을 넘지 못하고 그대로 다시 반납하는 책이 되었다.
이렇게 꾸며진 이야기에 관심을 끊고 있다가 도서관에서 지역 소설가의 강연회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묘한 호기심이 일었다. 바로 다음날이 강연회라 접수 마감이 끝났겠지만 데스크에 추가 접수가 가능한지 물었다. 직원은 반갑게 내 이름과 연락처를 적었다. 추가접수 되었으니 내일 시간 맞춰 오시면 된다고 하였다. 지역작가라 인지도가 낮아서 자리가 있구나 하는 생각과 강연에서 뭘 얻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동시에 들었다.
소나기가 하루종일 쏟아지고 있었다. 10시에 시작하는 강연에 맞춰 집을 나서면서 접수를 하지 말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도서관에 도착해서 차를 주차하고 시동을 끄니 투둑투둑 하는 빗소리가 환영하는 것같이 요란했다. 비 오는 토요일 아침에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이 몇이나 있다고… 그중에 하나가 나라는 사실에 뿌듯해하며 가방을 챙겨 차문을 열었다. 강연장에 들어가니 지역 독서회원들로 보이는 아줌마 부대가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나는 뒷자리 구석에 이방인처럼 조용히 앉았다.
시간이 되자 강사 소개를 간단히 한 도서관 직원이 양해를 구했다.
"작가님이 PPT를 열심히 만들어 오셨는데 대회의실 장비 케이블 연결이 안 되어 여기선 틀 수가 없게 되었어요. 건너편의 시청각실에 세팅을 해둘 테니 단체 사진을 찍고 같이 이동하겠습니다. 양해 부탁드려요."
강연회 끝나고 해야 할 단체 사진을 먼저 찍고 다른 방으로 이동했다.
강연이 시작되었다. 보통 작가들은 PPT를 사용하지 않고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가는데 이 작가님은 PPT를 통해 이야기를 했다. 강연은 분명 며칠 전부터 쓰고 고치길 반복했을 스크립트를 보고 읽는 것이 다였다. 중간중간 자신의 글을 인용할 때는 독서회 회장이나 회원이 나와서 성우와 같은 목소리로 읽어주었다.
'이런 강연도 있구나!'
소설의 스킬이나 다른 장르와의 글쓰기 차이점에 대해 배우러 왔는데 작가의 강연 의도는 내 생각과 완전히 달랐다. 소설가가 자신의 고통, 상실, 사회의 부조리 등을 어떻게 품어서 글로 만들어 내는지에 대해서 집중하는 강연이었다.
'현실이 힘들 때 글로서 도피를 하는 사람들이 꽤 있지만 그런 글들을 작품으로 만들고 다른 사람들의 공감까지 이끌어 내는 것이 소설가구나'
소설가가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60년에 가까운 그녀의 인생여정을 따라가면서 소설가로서 좋은 글을 쓰는 방법을 몇 가지를 건졌다. 소설의 배경이 되는 지역을 자주 방문하는 것, 색다른 경험을 하면서 소재를 모으는 것, 화자를 바꿔보는 것, 다른 사람의 글을 끊임없이 읽는 것, 꾸준히 쓰는 것과 같은 뻔하지만 실천을 잘 못하는 것들이었다.
1시간 10분 남짓의 강연이 끝나고 질문시간이 왔다. 이전에 공무원이었다고 하셨는데 어떤 업무를 하셨는지와 같은 개인적인 질문이 대부분이라 답변이 별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나도 여기에 얼굴을 내밀었다면 작가와 소통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평범한 질문 하나를 했다.
"작가님은 본인만의 글 쓰는 의식이나 방법을 가지고 계신가요? 아침에 일어나서 바로 글을 쓴다거나 문장을 짧게 쓴다거나 하는 것들이요."
작가는 누구나 예상하는 대답을 내놓았다.
"아침에 집중이 잘 되어서 아침에 써요. 그리고 문장을 짧게 쓰려고 노력해요. 감정을 전하는 문장은 길어지더라도 자르지 않고 그대로 쓰고요."
나는 답변에 감사한다는 말을 하고 다시 입을 다물고 앉아있었다. 오늘 작가의 강연에서 인용된 작가의 글들은 전부 생소한 것들이었기에 '좋은 경험 했다' 정도로 만족하고 더 깊이 팔 생각은 없었다. 한데 질의응답이 끝나고 전혀 생각하지 않은 일이 벌어졌다. 작가가 자신의 책을 가지고 내게 온 것이었다.
"제 책 안 가지고 계시죠?"
"아, 네."
"여기 있습니다. 가지고 가서 보셔요."
"아니요. 괜찮습니다. 이런 건 제가 사서 봐야지요."
이런 말을 하는 나에게 미소로 책을 쥐어주고 작가는 다른 참석자들에게 갔다. 나는 받은 책을 이 자리에서 다른 사람에게 주면 작가에게 실례가 될걸 알았기에 차라리 이왕 받은 거 작가를 한번 더 번거롭게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까 받은 책에 싸인을 좀 해주실 수 있을까요?"
다른 참석자들과 얘기가 어느 정도 끝나가는 작가에게 받은 책을 다시 건넸다. 작가는 내 이름을 물어본 후 기꺼이 앞장에 사인을 해 주었다.
작가의 사인을 받고 나니 이 책만큼은 꼭 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와서 책에 실린 단편 중 오늘 강의 때 일부가 인용된 소설 하나를 소리 내어 읽었다. 졸혼과 이혼에 대한 이야기였다. 소설을 읽는데 마치 수필과 같았다. 소설과 수필은 전혀 다른 장르라는 전제가 무너진 느낌이었다. 사실은 본인 이야기인데 글의 소재가 이혼이다 보니 소설이라고 이름 붙인 건 아닐까라는 의심을 해 볼 정도였다.
이번 소설가의 강연은 다른 글쟁이나 강사들의 강의와는 여러모로 달랐다. 굳이 길지 않아도, 기가 막힌 반전이 있지 않아도, 일상을 묘사하는 정도라도 소설이 될 수 있음을 알게 해 주었다. 소설이 어렵다는 선입견만 버리면 수필이나 소설이나 똑같이 사람 사는 이야기인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