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사는 처제의 산달이 되었다. 처제는 아이를 많이 갖고 싶어 했다. 2년 간격으로 아이들이 태어났는데 이번에 넷째 차례였다. 7살, 5살, 3살 아이들을 혼자 챙기기는 버거운 상황에서 아기가 또 태어난다니 처제도 처제지만 장모님과 와이프가 걱정을 많이 했다.
미국은 산후조리원이 보편화되어있지 않다. 아이를 낳으면 당일 퇴원하거나 다음날 귀가한다. 처제는 아이 낳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다만 갓난아기를 보는 동안 신경 쓰기 어려울지 모를 세 아이를 걱정했다. 누군가의 손이 간절했다. 산후조리를 위해 장모님이 가시고자 했으나 한 기관을 맡고 있어 일주일 이상 몸을 뺄 수 없었다.
기관에서 행정을 보는 와이프 역시 몸을 빼는 게 쉽지 않았다. 그나마 장모님보다는 운신(運身)의 폭이 있어 큰 맘을 먹는다면 미국에 다녀올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가족도 올해 1월에 태어난 아기가 있지만 내가 아기를 전담해서 볼 수 있었다. 지난 6개월간 아기보기로 단련되어 돌발상황에 대한 대응도 문제없었다. 7살 첫째는 와이프가 미국에 갈 때 같이 가서 또래들과 함께 지내면 되었다. 한국에서 즐길 수 없는 미국의 문화를 접하고 오는 것이 아이에게도 여러모로 좋을 것이었다.
직장에서 와이프에게 휴가 허락이 떨어졌다. 코로나19 기간 동안 수많은 곤란한 일을 책임자의 위치에서 처리하여 스트레스를 많이 받던 아내였다. 그런 보상 차원의 휴가기도 했다. 나도 처제의 산후조리에 힘을 보태면서 첫째의 견문을 넓히는 임무를 함께 하라는 조건으로 허락했다. 기간은 5주였다. 처제가 5주간 언니의 보살핌을 받고 이후 2달반은 아빠의 도움을 받는 계획을 세웠기 때문이었다. 와이프와 손 바꾸기 위해 장인어른도 미국에 가셔야 했지만 이로서 처제는 아기를 낳고 100일 동안은 혼자가 아닐 수 있게 되었다.
코로나로 닫혔던 하늘길이 열리고 나서 처음으로 외국 땅을 밟는다는 설렘에 와이프는 즐거워했다. 업무에서 멀어져 있을 동안 해야 할 일을 정리하고 직원들에게 할 일을 배분했다. 처제에게 가져갈 한국 물품들을 사서 박싱 하고 미국 가서 지낼 동안 필요한 물건들을 새 캐리어에 차곡차곡 담았다. 눈 깜짝할 사이에 출국일이 되었고 8월의 어느 날 와이프와 첫째는 미국으로 떠났다.
나와 6개월 된 아기와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당분간 와이프 없이 혼자 애를 봐야 하니 어지간히 급한일이 아니면 하원 시간까지 아기를 부탁한다고 어린이집에 말해두었다. 어린이집 원장 선생님은 평소에 아기가 조금만 묽은 변을 보면 병원에 데려가라고 전화하였다. 콧물을 흘리고 기침을 하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는 날은 죄인의 심정이 되기도 하였다. 큰일 난 것처럼 호들갑 부리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 보면 열도 없이 아기는 잘 놀았다. 병원에 가서 진찰받아보면 아기들은 원래 그럴 때도 있다며 유산균제를 처방받거나 콧물 약을 처방받았다. 아무리 전염을 조심해야하는 어린이집이라 조그만 증상에도 예민하다지만 이런 일이 몇 번 반복이 되자 따끔하게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와이프가 없는 상황에서 정확하게 전달해 놓지 않으면 또 아기가 이상이 없는데 멀리 나가 있는 나를 부를 터였다.
사정을 말하고 진지하게 부탁을 했다. 원장 선생님도 그간 미안한 마음이 있었는지 웬만한 일을 원에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거기에 더해 애 엄마 없는 동안 이유식은 원에서 만들어 먹이겠다고 했다. 와이프가 미국 가면서 걱정했던 것 중 하나가 이유식을 만들어 먹이는 것이었는데 선생님의 말 한마디로 해결되었다. 비록 아기가 이유식을 먹는 양은 매일 원에서 싸주는 양의 1/10도 안 되는 (아기 숟가락으로 열 숟가락 내외) 양이지만 내가 매일 만들어 먹일 수고를 안 해도 되었다. 그간 쌓인 아쉬움이 이유식 하나에 스르르 녹았다.
와이프와 첫째가 없는 첫째 주는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집에 돌아오면 낮동안은 총각 때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업무를 끝내고 나서는 나만의 시간이었다. 여유를 부리다가 어린이집 하원 시간이 되면 아기를 데리러 갔다. 저녁시간에 아기와 둘만 있으면 홀아비가 된 기분이 들었다. 아빠 얼굴을 보며 생글생글 웃는 아기는 아빠가 잠깐만 안 보여도 울었다. 아기를 식탁 한편의 아기의자에 앉혀놓고 앞에 물고 빨며 좋아하는 것들인 딸랑이, 장난감, 흰색 밥주걱을 놔뒀다. 이렇게 하면 30분 정도의 시간이 생겼다. 얼른 어린이집 가방을 정리하고 젖병을 소독하고 빨래를 돌렸다. 슬슬 앉아있는 게 힘든지 칭얼대기 시작하면 분유를 타서 먹이거나 안고 집안을 서성거렸다.
장모님이 퇴근하시면 짐을 부려놓고는 우리 집으로 달려오셨다. 그러면 아기를 안고 옆에 있는 처가로 갔다. 장모님이 아기를 봐주시는 동안 저녁식사를 마치고 장모님과 손을 바꾸었다. 두 사람이 식사를 마치면 장모님이 아기와 놀아주었다. 나는 집에 와서 못 끝낸 컴퓨터 작업을 하거나 집안 정리를 하였다. 9시가 넘으면 장모님이 자고 있는 아기를 안고 와서 잠자리에 눕혀주었다. 그러면 하던 일을 멈추고 불을 끄고 잠을 청했다.
이런 루틴이 반복되었는데 첫째 주에는 외로운 마음이 자꾸 생겼다. 새벽에 아이가 울어대어 분유를 타거나, 장모님이 늦게 오셔서 혼자 아기를 돌보며 식사를 할 때가 대표적이었다. '든 사람은 몰라도 난 사람은 바로 안다'더니 두 사람의 빈자리가 느껴졌다. 아기가 칭얼대면 엄마와 형이 없어 우는 것 같아 괜시리 측은한 생각도 들었다.
사람은 적응하는 생물이라고 했던가. 둘째 주가 되자 외로운 감정을 느끼는 시간이 없어졌다. 가장 큰 이유는 바빠졌기 때문이었다. 컨설팅이나 심사평가 업무는 1년 중 8~9월이 가장 바쁜 시즌이다. 내가 아기를 데리고 같이 미국을 갈 수도 있었지만 그렇지 못한 것은 아기가 너무 어려서도 있지만 업무 스케줄이 빡빡했기 때문이었다. 아기를 어린이집에 보내고 부산으로 창원으로 대구로 영천으로 바쁘게 다녔다. 하원 시간 늦을까 봐 부리나케 울산으로 달려와 아기를 하원 시켰다. 하원하고 아기의 가방 정리하면서 내 업무 가방도 정리하는 바쁜 생활이 이어지자 외로운 감정은 느낄 새가 없었다. 사람들이 일에 빠져 사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첫 주에는 일이 거의 없었고 있어도 금방 할 수 있는 일이라 컴퓨터 앞에서 빈둥대던 시간이 있었다. 유머 게시판의 유머글도 빠짐없이 볼 수 있었다. 둘째 주부터는 본의 아니게 업무 의뢰가 많이 들어와 그럴 시간이 없어졌다. 자연히 유머 게시판의 업로드 속도를 따라잡을 수도 없었다. 추석이 가까워지자 내 업무뿐 아니라 벌초를 챙기고 부모님 용돈, 선물세트 등 명절에 챙길 것들도 혼자 준비하여야 했다. 냉장고 자리를 오랫동안 차지하던 반찬들을 계획적으로 꺼내 먹었고 여름옷과 이불들도 정리하였다. 와이프가 카톡으로 미국에서 지내는 사진을 보내면 그때서야 와이프와 큰애가 생각이 났지만 싱긋 웃고는 다시 일상에 파묻혔다.
추석이 지났고 5주가 금방 지났다. 곧 와이프와 첫째 아이가 돌아온다. 아직 업무는 바쁜 시기의 한가운데에 있다. 네 식구가 모이면 전과 같은 생활로 돌아갈 것이다. 이제 다시 외로움과 거리가 있는 생활이 기다리고 있다. 외로움을 일을 통해 미봉(彌縫)하던 지난 4주 동안과는 다른 생활이다. 지난 5주간은 결혼 후에는 만날 일이 없던 외로움과 오랜만에 다시 만났고 그 녀석을 의도적으로 피해 다닌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