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르르 밀려왔다. 후루룩 빠졌다. 사람들은 개미들 마냥 쏟아져 나왔다가 모래알 흩어지듯 사라졌다. 지금 시간은 7시 40분.
오전부터 시작하는 심사원 교육이 있어 서둘러 서울에 왔다. 정부가 인정하는 범위에 맞게 기업을 운영하고 있는지를 현장에 직접 나가 심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교육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요일마다 차수를 나눠서 받는다. 작년에는 주말에 받았더니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지 못해 올해는 월요일로 정했다. 일 년에 한 번, 하루치 교육이라 지각이 허용되지 않기에 새벽부터 서둘렀다. 교통수단을 3번 나눠 타가며 부지런히 이동하였다. 그 덕에 한 정거장만 더 가면 목적지인 여의도역이다.
이번 정거장을 알리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오고 문이 열린다. 사람들이 쏟아진다. 잘 매 둔 쌀자루가 풀려 쌀알이 쏟아져 나오는 것 같다. 나도 쌀자루를 빠져나가는 쌀 한 톨이 되어 발 디딜 틈 없던 전철에서 벗어난다. 플랫폼으로 나온 사람들은 일제히 계단으로 향한다. 목적지를 향해 바삐 움직이지만 병목을 피할 수는 없다.
30분쯤 전 서울역에서는 저런 무리 속에 섞여 있었다. 앞사람이 한 발을 내디뎌야 나도 한 발을 내딛을 수 있었다. 군중 속에 이미 섞인 이상 한 사람의 힘으로는 피할 수도 나갈 수도 없었다. 1층 플랫폼에서 2층 대합실까지 늘어선 행렬의 일원이 되어 무작정 걸을 뿐이었다. 대합실 나가는 곳 팻말이 보이자 사람들은 여러 게이트 속으로 흩어졌다. 거짓말처럼 내가 속한 군중은 사라졌다.
동시에 뛰쳐나온 사람들이 엉겨 꽉 막힌 계단이 어수선하다. 교육장은 걸어서 10분 거리이다. 교육시간까지 1시간의 여유가 있다.
급하지 않으니 군중에서 멀찍이 떨어져 보기로 한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유리벽에 적힌 시를 한편 읽는다.
오늘 아침도 웃는 얼굴 아름다워라
먼저 비켜서 주는 마음 아름다워라
겸손히 배려하는 자세 아름다워라
......후략......
‘언제나 아름다운 사람’이란 제목의 시민 공모작이다. 올라가는 계단이 아직 붐빈다. 시 한 편으로는 부족하다. 여의도 주변 지도를 살펴본다. 이미 잘 알고 있지만 내가 나갈 출구와 교육장까지의 길을 눈으로 천천히 따라가 본다.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르니 이제야 계단 입구가 휑하다. 내 보폭에 맞춰 계단을 오른다. 조금 일찍 가려고 남의 보폭을 따라갔었다. 지금은 내가 갈 곳과 도착할 시간을 정확하게 알고 있다. 내 옆에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보이지 않지만 마음은 자유롭다.
계단을 오르고 나니 에스컬레이터가 나온다. 앞뒤에 사람 없이 느긋하게 오른다. 가만히 서 있어도 위층으로 올려주는 에스컬레이터가 고맙게 느껴진다. 이내 땅이 울리는 소리가 나며 조용하던 역안이 시끄럽다. 내가 내린 건너편 플랫폼에 전철이 도착했나 보다. 그 전철을 타고 온 사람들 중에 서두르는 사람들의 머리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에스컬레이터를 후다닥 오른 그들은 한 켠으로 비켜서 있는 나를 지나쳐 간다. 피했다고 생각했던 번잡함 속에 다시 갇혀버린다.
에스컬레이터를 다 오르니 개찰구 앞은 만원이다. 다시 서성이며 사람 구경을 하고 있다가 그들이 빠져나가고 나서 교통카드를 찍는다. 다시 내 속도를 찾았다. 계단을 올라 햇빛을 마주한다. 지하에서의 번잡함이 한순간에 날아간다. 그렇게 뭉쳐 다니던 사람들은 이미 각자 갈 길로 사라진 지 오래다.
고등학생 때는 대학 입학이라는 목표가 있었다. 앞뒤로 같은 처지의 친구들에 둘러 쌓여 있었다. 각기 실력은 달랐지만 우린 대입을 위해 함께하는 사이였다. 시험 하나를 치고는 어떤 친구는 서울로 어떤 친구는 부산으로 각기 흩어졌다. 대학에 가서는 선배, 동기, 후배들이 주변에 있었다. 졸업 전까지 사회진출이라는 목표를 공유하던 사이였다. 대학을 나오니 그 많던 동료들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사는 것도 생각도 다른 사람들이 잠시 함께 있었던 것뿐이었다. 자기 인생은 자기가 사는 것이었다.
교육장에 도착한다. 오랜만에 보는 운영진과 인사한다. 아직 출석부도 나와있지 않다. 지하철 빨리 벗어나기 시합에서 꼴찌를 한 내가 오늘 교육받는 50명 중에서는 1등이다. 내가 갈 길과 그 길에서 걸릴 시간을 알고 있다면 느린 걸음이라도 문제가 없다. 삶은 내 걸음에 맞춰 내 의지로 살아가야 한다.
서울을 모세혈관처럼 연결하는 지하철. 오늘도 사람들은 모이고 흩어짐을 반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