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초부터 8월이 시작된 지금까지 냉장고에서 수박이 비는 날이 없었다. 이 말은 곧 수박껍질과 수박씨를 매일 집 앞 텃밭에 버렸다는 얘기이다.
7월이 되자 비가 매일같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을 못 본 날을 찾는 것이 더 쉬웠다. 덥고 습한 날이 지속되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에어컨 없이는 견디기가 힘들었다. 흡사 비닐하우스에 갇힌 느낌이었다.
그날도 아침부터 비가 오더니 갑자기 땡볕이 내리쬐었다. 집을 나서는데 무심결에 쳐다본 텃밭에 주먹만 한 수박이 보였다. 사실 덩굴이 밭의 가장자리를 덮고 바깥까지 뻗어 나와 있는걸 일주일도 더 전에 눈치채곤 있었다. 그것이 매년 장인어른께서 밭에 심어 두시는 호박 덩굴이려니 생각하고 넘겼을 뿐이었다.
수박을 자세히 보려고 다가갔다. 확실히 수박덩굴에 달린 잎사귀는 호박의 그것과 모양이 달랐다.
'우리 텃밭에 정말로 수박이 열렸네!'
수박덩굴은 한두 개가 아니었다. 주변에 이리저리 뻗은 줄기 곳곳에 손톱만 한 열매들이 보였다. 각 덩굴줄기마다 끝 부분엔 노란 수박꽃들이 많이도 피어있었다. 꿀벌들이 바삐 날아다니며 내는 "윙윙" 소리로 미루어 지금이 한참 열매 맺는 시기란 걸 알 수 있었다.
'견디기 힘든 한증막 같은 더위가 수박을 이렇게까지 키워내다니 살다 살다 이런 일도 있구나!'
기대하지 않은 수박을 보고 나니 갑자기 욕심이 생겼다. 볼 일을 보고 집에 돌아와서 수박농사를 짓는 유튜버의 영상을 보았다. 열매를 크게 맺게 하기 위해서는 수박 한 줄기에 열매하나만 남기고 전부 솎아주어야 했다. 부모님의 사과농사를 도와드리며 적과를 해봤기에 그 원리가 바로 이해 갔다. 그렇게 한동안 쳐다도 보지 않던 텃밭을 매일 돌보게 되었다.
또 며칠이 지났다. 저녁에 수박에 물을 주려고 물뿌리개 호스를 틀면 한낮의 볕에 달궈져 열탕물에 버금가는 뜨거운 물이 뿜어져 나왔다. 이런 날씨가 주먹만 하던 수박을 18개월 된 둘째의 얼굴만 하게 키웠다. 거기에 더해 다른 씨앗에서 난 줄기들에도 주먹보다 조금 큰 수박들이 서너 개 더 열려있었다.
'제대로 키우면 마트에서 파는 수박 못지않은 작품이 하나 나오겠는데!'
수박농부의 영상을 다시 찾아보았다. 그는 수박의 원줄기에서 수박이 맺힌 줄기를 뺀 다른 줄기들을 잘라주어야 영양이 수박에 집중된다고 했다. 시간을 내어 원 줄기를 놔두고 다른 덩굴줄기들을 제거하기로 하였다.
그동안 얼마나 수박씨를 밭 곳곳에 흩뿌려 놨는지 수박덩굴은 온갖 곳에서 나와서 이리저리 얽혀있었다. 큰 수박의 줄기를 눈으로 따라갔다. 수없이 꼬인 것을 찬찬히 살피며 수박덩굴의 뿌리에 다가가니 원 줄기가 크게 2갈래로 갈라져있었다.
수박 맺힌 줄기 옆에 있는 굵은 줄기를 손으로 꺾어보았다. 작은 줄기는 손으로 꺾였지만 이런 줄기는 손으로는 꺾기가 힘들었다. 호미를 찾아와서 수십 번 내리치니 줄기가 잘려나갔다. 뿌듯한 마음으로 솎아낸 줄기를 정리했다.
줄기를 걷어 내는데 큰 수박이 움직였다. 줄기끼리 엇갈리며 움직였을 거란 생각을 하며 대수롭지 않게 여기려는데 등에서 서늘한 기분이 들었다.
'아닌데, 아닐 거야!'
설마 하는 마음으로 서둘러 줄기를 걷어내고 보니 줄기 끝에 애지중지하던 둘째 얼굴만 한 수박이 매달려 있었다.
'분명 정확하게 줄기를 따라갔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지?'
이렇게 나의 작품은 덩치를 더 키우지도, 빨갛게 익지도 못하게 되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잘린 수박 줄기의 끝을 땅에 묻어두었지만 한나절 만에 잎사귀는 모두 시들었다. 저녁에 수박을 줄기에서 분리시켜 껍질을 씻었다. 어린이집을 다녀온 둘째에게 보여주니 "공, 공" 거렸다. 수박이 공인줄 알고 꼭지를 들었다가 땅에다 굴렸다가 잘 가지고 놀았다.
애초엔 신경도 안 쓰다가 갑자기 큰 수박을 보고 욕심이 생겼다. 잘 키워보겠다는 기대를 가지니 몸이 농부처럼 움직였다. 다만 초보 농부라 여러모로 어설퍼 결국 수박 하나를 망치고 말았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이제는 마음을 비우기로 했다.
'자기가 클 운명이면 크겠지'
크기는 작지만 아직 남아있는 서너 개의 수박은 아침저녁으로 물만 주기로 했다.
7월 마지막주부터는 장마철이 끝나서 그런지 물을 준다고 줘도 솎아버린 수박만큼 쑥쑥 자라는 열매가 없었다. 그래도 마음을 비우니 그냥 저 크기로 익기만 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텃밭을 관리하며 느낀 점은 수박 농사가 마치 자식 농사와 같다는 점이다. 아이가 좋아하는 걸 하도록 방치하다가 어느 순간 뭐라도 잘하는 모습이 보이면 부모가 욕심을 부리기 시작한다. 구구단을 잘 외우거나 받아쓰기를 잘하거나 한자를 잘 외우고 노래가사를 잘 외우면 천재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장비를 사들이고 학원을 알아보면서 교육을 시키려 한다. 아이가 뒤늦은 부모의 참견에 잘하던 것에 재미를 잃어가면 그때서야 자신의 욕심이 오히려 아이를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이도 아침저녁으로 물주는 정도에서 보살펴야 한다.
'자기가 클 운명이면 크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