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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정은 Feb 13. 2021

중환자실에서 72시간의 기다림

내가 신이냐?라고 했던 의사는 퇴근을 했고, 다음번 근무자로 체인지가 되었다.

나는 스테이션 앞을 서성거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선생님, 선생님, 저희 아버지 시티 검사 결과 알 수 있을까요?

사실 시티 검사 후 간호사에게 물었더니, 판독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라고만 했다.

다급한 내 마음을 누가 알 것인가?

마냥 기다리는며 의료인이 설명할 때까지 참아야 하다는 걸 잘 안다.

보호자가 되어보니 인내심이 한계에 달해서 가슴이 터질 거만 같았다.

CT 판독까지 기다리는데 하루가 지나간다.

응급실 의사라면 대충이라도 설명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선생님.. 선생님.. 을 불렀다.

내가 신이냐?라고 했던 의사보다는 체인지된 이 의사 선생님이 훨씬 더 나았다.

내 얼굴을 보더니 자기가 보기엔 담낭 담관 쪽에 돌이 막고 있다고 했다.

판독이 나와봐야 알겠지만,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라고 설명을 듣는 순간 나는 감사합니다. 선생님을 연발했다.

오늘 처음으로 의사의 얼굴을 보며 들을 수 있는 설명이었다.

다만 지금 피검사 결과가 전체적으로 다 좋지 않다.

장기 기능 부전에 빠졌다.

라는 말을 덧붙여 설명을 들었다.

응급실에 도착 후 12시간이 지나고 나서 처음으로 설명을 들었다.

그것도 체인지된 선생님 앞에 서서 초조하게 물어본 후에 말이다.

보호자가 되어보니 이렇게 간곡할 수가 없다.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며 저기요,, 선생님,, 죄송한데요.. 감사합니다.

이 말을 몇 번을 했는지 모른다.

아프다는 게 서럽다는 말을 그날 나는 눈으로 다시 한번 확인했다.

몇 시간 후 내과 선생님이 오더니 내일 교수가 와서 담관 쪽에 튜브를 삽입할 것입니다.

사실, 지금 해야 하는데 교수님이 안 계시거든요.. 학회 가셔서요.

다른 병원 옮기셔도 되긴 하는데, 위험하실 거 같아요..

그럼 응급이라는 말인가요?

응급인데.. 교수가 없다니..

선택의 여지가 없다.

버틸 수밖에...

무책임한 현실에 또 한 번 무너졌지만, 나는 힘을 내서 물었다.

내일은 꼭 교수님이 오시는 거죠?

라고 되묻자 네..라는 대답을 들었다.

응급실에서의 전쟁통 같은 하루가 지나고 아버지는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중환자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인사를 했다. 

나는 울음을 참으며 아버지, 힘내세요.

아버지, 아버지.. 를 외쳤다.

그렇게 3중 환자실 앞에서 나는 참았던 울음을 뱉어냈다.

의료인 일 때는 늘 드나들던 중환자실이 보호자 입장이 되어보니 차가운 얼음 문처럼 느껴졌다.

보호자 대기실이라곤 앞에 몇 개 있는 의자뿐이었다.

거기서 나는 처음으로 앉아서 김밥 한 줄을 먹었다.

김밥은 돌을 씹는 맛이었고, 내 목구멍을 넘어가는 순간 다시 뱉어내고 싶었다.

간호사 한 명이 중환자실에서 필요한 물품을 설명해주었고, 2층의 편의점에서 사 오라며 쪽지를 건넸다.

베개 4개, 기저귀 4개, 물티슈 4개, 컵 2, 마스크 2통 등등 적혔다.

편의점에서 그 물건들을 고르는데 순간 이곳 편의점은 장사 잘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보다 더 비쌌다.

10만 원 상당의 물건을 혼자 짊어지고 가면서 보호자에게 이걸 꼭 사 오라 해야만 하나?

너희들이 뭘 알겠니? 라며 속으로 되뇌며 끙끙 대며 들고 갔다.

중환자실 벨을 누르자 간호사 한분이 나와서 물건을 휙 들고 들어간다.

그 뒤에 대고 선생님 잘 부탁합니다.

선생님 수고하세요..라고 말했다.

그 순간 나는 약자였으니 말이다.

중환자실 앞 의자에 앉아서 밤을 지새웠다.

새벽에 포터블 방사선을 끌고 가는 의료인, 약을 타기 위해 약국으로 가는 의료인, 피검사를 맡기기 위해 임상병리과를 가는 의료인들만 분주히 움직였다.

의자에 기대어 잠시 눈을 감았다.

1998년 11월에도 언니의 병환으로 나는 광주의 대학병원에서 1년 가까이 간호를 했다.

그때는 간호사라는 이유로 중환자실을 오갈 수 있었다.

교수와 주치의들은 이런 동생이 어디 있냐며 의학잡지에 글을 썼다.

그때는 이렇게 냉정하지 않았는데,,

김밥 한 줄과 바나나 우유를 사준 주치의 선생님도 있었고, 힘내라며 편지 써준 간호사도 있었는데..

20년이 지난 지금 2020년 11월에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광주의 다른 모 대학병원에 와있다.

내가 신이냐? 며 쏘아붙이는 의사를 보았고, 편의점 가서 사 오세요라며 냉정하게 말한 간호사를 보았다.

20년이 지난 지금 나는 의료 현장이 아닌 보호자가 되어 이곳에 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일요일 아침에는 교수가 와서 시술을 하겠다던 어젯밤 의사의 말과 달리 오전 시간이 지나도 교수는 보이질 않았다.

나는 벨을 눌러서 간호사에게 물었다.

어제 응급실에서 설명 듣기로는 오늘 꼭 해야 한다고 하던데..

교수님이 안 오셨나요?

간호사는 당황하며 저희도 아직 연락을 못 받았어요..

오늘은 일요일이라서 교수님이 안 올 거 같은데.

아니요.. 어제 응급이라면서 오늘 꼭 시술해야 된다고 했어요..

어제 응급실 내과 선생님께 물어보세요..

간호사는 저희도 연락이 와야 하는 거라서요....

나는 순간 화가 치밀었다.

학회? 일요일? 

사람 생명 가지고 장난하니?

응급이라면서.. 응급이라서 빨리 튜브 넣어야 한다면서..

다시 연락해보세요..라고 되풀이만 했다.

그렇게 일요일에도 교수는 오질 않았다.

마냥 기다리라는 말만 들었고 월요일 아침까지 꼬박 72시간을 의자에서 나는 기다렸다.

교수님,,. 교수님에게 환자란 무엇인가요?

학회 가신 거 맞나요?

그렇게 일요일 저녁이 지나고 월요일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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