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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llie May 05. 2020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생각

통제와 자율, 소통, 그리고 사람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대한 이야기들을 종종 접합니다. 그 중 개인적으로 눈길이 가는 주제는 감시와 통제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는 개인의 이동경로나 접속기록 등의 우리들의 생활이 더욱 감시와 통제를 받기 쉬워질 수 있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개인적인 생각부터 이야기드리면 이에 대한 정답은 "우리들에게 달려있다"라 말해야 할 듯 합니다. 


통제와 자율이라는 주제는 HR이라는 일을 하는 입장에서 그리 낯선 존재는 아닙니다. 최근 읽어 본 어느 글에 Walton이라는 분이 HR system을 control관점과 commitment관점으로 나누어 쓴 글을 보았는데 이 글이 쓰여진 시점이 1985년이기도 하죠. HR이 통제와 자율이라는 주제에 낯설지 않다는 말은 뒤집어보면 우리들 상당수도 이 주제를 매일 만나고 있었음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무수히 많은 제도들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언론이나 혹은 어느 누군가가 이에 대해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우리들은 체감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흐름에 대하여

통제와 자율 중 무엇이 옳은가에 대해 하나의 답을 이야기하기란 어려운 일입니다. 만일 그랬다면 HR을 하면서 '균형'이라는 단어를 고민할 필요도 없겠죠. 다만 인류가 살아온 시간의 흐름 - 우리가 학창시절 배운 역사적 흐름 - 을 생각해본다면 어쩌면 우리는 과거 통제의 관점에서 좀더 자율의 방향으로 이어가고 있다는 일종의 느낌적 느낌 정도는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코로나 라는 변수는 이러한 흐름에 일종의 생각 포인트를 제공합니다. 자율이라는 흐름을 보면서 그 자율이 보다 완성되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간단히 표현하면 우리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 역으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프랑스의 어느 변호사분은 이동경로 추적 및 공개와 같은 우리나라의 방역체계에 대해 자유가 없다며 비난을 했다고 하지만 사견임을 빌어 그분의 이러한 의견에는 '자유를 누리기 위해 스스로 지켜야 하는 것'에 대한 고민이 없는 이야기였노라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통제와 자율은 만일 우리가 이 세상에 혼자만 살고 있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 단어들입니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여럿이 함께 사는 세상에서 통제와 자율이 존재함을 말하며 이는 혼자만의 자유가 아닌 모든 이의 자유를 위한 것임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공유지의 비극을 방지하고 대신 공유된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가 함께 살고 있음을 인지할 필요가 있겠죠. 


제도에 대하여

기술이 발달하고 그 기술을 활용할 기회가 증가하더라도 그 기술이나 기회가 남용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바로 사람이라는 존재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그 기술이나 기회가 쉽게 남용될 수 있도록 할 수 있는 것도 사람이라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기술이 발달하고 교류가 활발해지더라도 기후변화에 협력하고 남용하지 않는다면 코로나로 비워진 공간에 야생동물들이 돌아오는 것을 보며 왠지 모를 미안함을 느끼지 않아도 될 수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입니다. 감시와 통제를 할 수 있는 제도와 환경이 만들어지더라도 그 제도에 대해 결정하고 운영하는 사람들이 이에 대한 균형을 잡을 수 있다면 제도는 악용될 가능성을 줄이고 본래의 취지에 맞게 운영될 수 있을 겁니다. 코로나라는 변수에 대해 국민의 건강이라는 최우선의 가치를 지키기위한 최소한의 필요한 조치를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다시 사람으로 이동합니다. 


사람 그리고 소통

제도를 만드는 것도 그 제도를 활용하는 것도 결국 사람입니다. 제도를 만드는 이는 그 제도에 올바른 의도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며 제도를 활용하는 이들 역시 그 의도를 이해하고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두 요소가 제대로 연결되기 위해 '소통'이라는 요소가 더욱 중요합니다. '소통'이란 기본적으로 '정보공유'를 요구하며 그 공유의 수준과 정당성에 대해서 우리들은 '이해'가 확보되면 우리는 더 이상 그것을 통제 내지 자유의 침해로 바라보진 않을 겁니다. 그 균형점에 대한 판단의 중심에는 역시 '사람'이 있게 되겠지요. 


HR이라는 일을 하면서 Line manager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최근 읽어 본 어느 글에도 이러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Line managers are often primarily responsible for communication with employees about their work and on organizational information such as decisions, procedures, and policies

출처:Den Hartog, D. N., et al. (2013). "HRM, communication, satisfaction, and perceived performance: A cross-level test." Journal of management 39(6): 1637-1665.


코로나 라는 상황에서 보면 질병관리본부장님이 '소통'을 위한 역할을 제대로 해주었기에 우리들이 정보를 공유받고 이해하고 조금은 상황에 대해 조급하지 않게 대응할 수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국가 라는 조직을 기준으로 말이죠. 제도의 취지와 방법론이 공유되고 그 취지와 방법론에 대해 우리들이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을 단지 우리가 조금 불편하다는 이유로 통제적이고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 아님을 이해할 수 있음을 이번 상황을 통해 우리들이 배운 점이 아닐까 싶습니다.


다시 사람으로

결국 사람으로 귀결됩니다. 우리가 제도를 어떻게 다루는가에 따라 그 제도는 선이 될 수도 악이 될 수도 있습니다. 통제와 감시가 가능한 기술과 가능성이 증가하더라도 그것을 바라보고 다루는 사람에 따라 그 모습과 결과는 달라지게 됩니다. 코로나라는 상황을 마주하면서 국민의 건강을 지킨다는 목적을 가진 사람과 자신의 이익을 먼저 보고 이에 따라 말이 달라지는 사람을 우리는 지금 상황에서 보고 있지요. 결국 사람이라는 답으로 귀결됨을 기 소개드렸던 책 중 아리스토텔레스의 이야기를 다룬 '열 번의 산책, 에디스 홀 지음, 예문아카이브'의 문장으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합니다. 

오직 인간만이 도덕적인 행위를 한다. 그래서 오직 인간만이 엄청나게 다양한 식물과 동물과 더불어 지구의 자연 세상에서 공동으로 살아가는 거주민으로서, 지구를 보살펴야 할 고유한 책임을 진다. 그러나 인간은 또한 그 고유한 정신적 재능 때문에 끔찍한 피해를 유발할 능력도 지니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섬뜩하게 사실적인 구분을 지으면서 말했던 것처럼, 한 나쁜 사람은 한 마리의 동물보다 1만 배나 더 많은 피해를 입힐 수 있다. 인간은 무기를 개발하고 사악한 목적을 위해 사용할 수있기 때문에, 비도덕적인 인간은 '가장 타락하고 야만적인 동물'이 될 수 있다. p230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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