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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pellie Dec 23. 2020

다면평가를 정리하며

내 자신에게 하고픈 이야기

다면평가를 정리하고 있습니다. 비록 조직규모가 작다 하더라도 다면평가를 시스템없이 수작업을 한다는 건 조금은 인내심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누군가는 시스템을 이용해보라고 말합니다. 잠시 생각해보면 시스템을 이용해도 제가 진행하는 다면평가에서 인내심은 여전히 필요한 부분으로 남지 않을까라는 생각입니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다면평가의 각 평가의견들을 취합하고 있는 제가 사용하는 문투로 변경하는 작업때문일 겁니다. 이 작업을 하는 이유는 다면평가를 함에 있어 평가의견을 통해 누가 평가했는지를 알아채지 못하도록 하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평가에 있어 솔직한 의견들이 나오지 못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처음 다면평가를 시행하면서 제가 구성원분들에게 약속드린 부분이기도 하지요. 경영진분들께도 말씀을 드렸습니다. 다면평가의 왜곡을 최소화하기 위해 평가자들을 경영진에게도 오픈하지 않고 의견들을 재정리하여 보고드리겠노라고. 어쩌면 무모해보일 수 있음에도 그 말을 믿어주셔서 저도 최선을 다해 re-writing을 하고 있습니다. 


사실 HRM을 나름 오래 해왔다고 하지만 다면평가는 이런 것이고 이렇게 해야 한다고 배운 적은 없습니다. 세미나, 모임에서 귓동냥을 하고 다른 기업 등에서 선배님들이 만들어 놓은 보고서를 보고 관련 책 등에서 보면서 그들을 통해 제가 느낀 점들을 지금의 다면평가로 구성하여 운영하고 있다고 말하는 게 지금 제가 하는 다면평가를 설명하는 가장 솔직한 표현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게 운영하는 다면평가에서 제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은 평가의견이란 본래 주관적일 수 밖에 없다 하더라도 솔직하게 작성되어야 한다 였습니다. 비록 아주 주관적이라 하더라도 그 느낌을 있는 그대로 남겨주길 바라는 마음입니다. 이를 위해 제도 초기에 평가자 정보를 이 제도를 수작업을 하는 저를 제외하고 대표이사님을 포함해 아무에게도 오픈하지 않도록 했고, 평가의견들을 다시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재작성 과정에서 혹여나 문장이나 문맥의 의미가 변질되지 않도록 노력하는 건 필수일 겁니다. 


법학을 전공하지는 않았으나 잠시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 헌법을 재밌게 본 적이 있습니다. HRM을 하면서는 근로기준법 등을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법의 일부를 만나면서 갖게 된 법에 대한 이해는 법학이란 일종의 해석의 학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명시적인 문구가 있는데 그 문구를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 그 문장을 다시 해석해야 함을 말합니다. 법문의 취지를 이해하고 실제 현상에서 그 취지에 부합하는 방향으로 해석하고 발생 가능한 경우들을 예상해보고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가는 과정입니다.


제가 하는 다면평가도 그렇습니다. 다면평가를 통해 솔직한 주관적인 의견들이 전달되었다면 그 다음에 하는 일은 그러한 의견들을 맥락에 맞게 해석하고 구체화하는 과정입니다. 다면평가를 통해 누군가의 '솔직한 느낌'이 남겨졌을 때 그 느낌을 단위조직과 리더와 그가 담당하고 있는 일 등과 연결지어 이 항목에 대해 이런 응답이 나온 이유가 무엇일지 해석하는 과정입니다. 응답자들의 일관된 패턴이 나올 수도 있고 서로 다른 의견들이 나올 수도 있습니다. 중요한 건 그러한 의견들이 나오는 이유에 대해 이해하는 것이겠지요. 이를 우리는 맥락을 이해한다고 말합니다. 


해석을 한다는 건 일종의 기준을 필요로 합니다. HRM이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방향성으로써 제가 가지는 기준은 '성장'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제가 하는 재작성의 과정은 다면평가를 통해 전달된 이야기들이 그 평가대상자의 성장에 도움이 되기 위해 어떻게 표현되고 전달되어야 할까?를 고민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과정에서 평가자의 솔직함이 훼손되지 않게 하는 과정이고 인사담당자로서 구성원의 성장을 바라는 마음을 담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퇴직하는 분들이 있으면 인사담당자로서 늘 퇴직면담을 합니다. 그리고 "다시 오고 싶은 기업이 되기 위해 어떤 부분들이 개선이 필요할까요?"라는 질문을 하곤 합니다. 많은 경우 보상, 복지, 리더 등의 이야기들이 오가는데 올해 어느 한 분에게서는 조금 특별한 대답을 들었습니다. 

다면평가를 계속 해주세요.


지금의 기업에서는 이러한 다면평가를 작년에 처음 시행했고 올해 두 번 째 입니다. 심지어 작년엔 개인별 피드백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와의 퇴직면담에서 다면평가를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의 마음을 얼마나 이해했을지 가늠하기란 어렵습니다. 다만 확실한 건 퇴직면담에서 건네진 그분의 말에는 진심이 담겨 있었다는 점일 겁니다. 


2009년을 전후하여 스마트폰과 SNS가 활성화되던 때의 제 모습이 떠올랐습니다. SNS를 처음 봤을 때 제 머리 속에는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겼다"라는 생각이 들어왔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그 당시에도 SNS를 그리 활발하게 하는 편은 아닙니다. 여전히 말하는 비중보다 보는 비중이 훨씬 많습니다. 그럼에도 무언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공식적인 공간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어느 정도의 위안을 받았던 느낌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 분의 다면평가에 대한 느낌도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무리 좋은 동료, 리더, 인사팀이라도 모든 면이 다 좋고 다 만족할 수는 없겠지요. 그렇다고 대놓고 이야기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닌 까닭입니다. 


다면평가를 하면서 제가 강조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작성하신 평가의견은 오로지 인사팀장인 저만 알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는 솔직하게 작성하셔도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인사팀장으로서 구성원과 상호간의 신뢰가 조금은 존재하고 있음을 전제로 합니다. 시스템이 도입되어도 제가 다면평가를 운영하는 것이 그리 쉬워질 것 같지 않은 이유이고, 조직과 사람이 모두 성장하는 모습을 꿈꾸는 인사담당자로서 기업과 사람에 기여할 수 있는 또 다른 역할이기도 합니다.


이 글을 쓰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제 자신을 다잡는 것에 있기도 합니다. 사실 개인별로 5~8명의 평가의견들을 읽어보고 이를 한 사람의 문장으로 재정리하다보면 어느 순간 생각이 멈추고 기계적으로 움직이려는 제 자신을 만나곤 합니다. 그럴 때면 잠시 화면에서 눈을 돌리고 제자리에서 움직이기도 합니다. 그럴 땐 제가 이 제도를 왜 이렇게 운영하고 있고 이 제도를 통해 만들어보려 하는 모습이 무엇인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글이 저에겐 그렇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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