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 황석희>를 읽고-그의 진심을 봐버렸다.
요즘 부동산, 주식, 코인 등 재테크 관련 책이 많이 나오고, 사람들의 대화 주제도 '어떻게 하면 돈을 많이 벌 수 있을까?', '돈 많이 벌어서 빨리 퇴사하고 싶다', 혹은 '나도 유튜브나 해볼까?' 등 돈, 부업과 관련된 것들이 많다. 카페에서 커피 한 잔 마시며 글을 쓰려고 앉아있으면 심심찮게 들린다.
겉으로 보이는 사회 현상들이 본업보다 부업 연구에, 본업보다 더 빨리 돈을 버는 재테크 공부에 더 열심이다. 출간되는 경제, 경영 책들만 해도 어마어마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찌 보면 당연한 현상일 테다.
최근에는 자신의 일에 대해 진지하게 대하거나 진심을 다 하는 사람을 보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그런 분들은 조용하게 묵묵히 자신의 일을 하며 살아가서인지, 드러나도 자본주의의 극에 가 있는 대한민국 사회의 공감을 사지 못해 이슈가 안되어서인지, 아니면 만연한 사회 현상이 개개인의 성실한 삶들을 가려버리는 것인지… 이유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그런 이들이 보기 힘든 현실이다.
그래서인지 자기 직업에 진심을 다 하는 사람, 그러니까 자기 일을 더 잘해보려고, 자기 일과 연관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려고, 자기 일의 보수가 충분하진 않지만 일이 주는 또 다른 기쁨과 충만함, 뿌듯함을 좋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는 사람들을 보게 되면 심장이 콩닥콩닥 설렌다.
에세이 <번역: 황석희>를 읽었다. 번역가 황석희는 이 에세이에서 약간의 냉소적인 어투로 영상 번역에 대한 현실과 어려움, 그리고 기대하는 미래에 대해 말하고 서술하고 있다.
그럼에도 영상 번역에 대한 그의 진심은 제대로 숨겨지지 않고 스멀스멀 새어 나온다. 읽는 내내 설레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었다. 조금 더 과장한다면 팬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더라. 황석희 번역가의 인스타까지 들어가 번역 외 그의 일상이 담긴 사진들을 엿보는데 일정 시간을 썼으니 말이다.
인상 깊었던 꼭지가 있다. ‘번역가의 개입’. 영상 번역에 대한 그의 끊임없는 연구와 고민 끝에 몇 가지 창의적인 방법을 자막으로 실현했다는 내용이다. 꼭지의 일정 부분을 아래에 인용한다.
자막 번역은 정말로 전달 수단이 글자밖에 없는 걸까?
물리적 한계를 넘을 수 없는 걸까?
당장에 떠오르는 것은 없었지만 그때부터 머릿속 한편에 늘 그런 호기심이 자리했다. 그리고 그 호기심은 자막을 하나하나 만질 때마다 효과적이고 창의적인 전달을 고민하는 사고의 폭을 조금씩 넓혀줬다. 그 후로 기회가 생기면 조금씩 자막에 새로운 시도를 해보기 시작했다. (중략)
이모지를 그대로 썼으니 이건 직역이라고 봐야겠다. (중략) 자막은 문자라고만 생각하지, 이모지 같은 이미지가 올라가는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데드풀 2(2018)에서는 원문 속 "pumpkin fucker"를 표현할 말이 딱히 없어서 글자 크기를 이용해 표현한 적이 있다.
번역가의 개입과 틀을 깨는 시도의 적정선을 찾는 일은 이 일을 놓을 때까지도 해결하지 못할 것 같다. 시도해도 불편하고 그냥 둬도 불편하고. 무슨 성격이 이렇게 불편하게 생겨먹었는지 모르겠다.
인용부 마지막에도 그는 ‘시도해도 불편하고 그냥 둬도 불편하고. 무슨 성격이 이렇게 불편하게 생겨먹었는지 모르겠다.’고 자신의 성격 탓으로 그 모든 노력을 돌리지만 나에겐 그렇지 않았다.
가끔 작은 부분에 대해 깊게 생각하고 변화를 주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예민하다, 그거 바꿔도 큰 변화 없다. 더 근본적인 걸 해결해야지.‘로 반응하는 사람들이 있다.
근본적인 것을 해결해야 한다고 ‘말만’ 한다. 그래서 어떤 문제를 발견했고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에 대해 고민하지 않는다. 작은 것부터 깊이 생각해 보고 실천하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질투와 시기를 느끼는 것인지 자신이 못하는 것을 남도 못하게 하고 싶은 것인지 모르겠다.
힘든 삶에 지쳐 피로와 무기력함이 그들을 덮쳤을 것이라 생각한다. 일이 익숙해져 감에 따른 태만이 스멀스멀 자란 것일지도 모르겠다. 흔히 이런 상태를 ‘고여있다’고 표현한다. 혹은 방관, 회피적 태도로 일관하는 것일 수도 있다. 주인이 아니라 관객의 입장으로 그저 눈앞의 흘러가는 상황들을 지켜만 보는.
어떤 이유에서건 삶의 모든 공격 요소에 피로해져 회피하거나 무기력해지거나 무관심해질 수 있다.
그럼에도 안일해지지 않고 작은 부분에서도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면서 그 값진 결과물을 나의 자랑 요소로 삼기보다 자신의 꼬인 성격에 귀인하는 사람이 참 멋있어 보인다.
직업인으로서의 삶에서 금전적 보상 이외의 보상을 스스로 찾아낼 수 있다면, 직업에 대한 애착이 한결 강해지고 당면한 작업을 대하는 성의도 커지기 마련이다. 나는 정말 운좋게도 그 보상을 찾아냈다. 그 보상을 받고자 감수해야 하는 스트레스와 부담이 나를 좀먹어서 머리가 뭉텅이로 빠지는 일도 흔하지만 이젠 그러려니 하는 수준까지 왔다. 자초한 짓 인걸. 나만 이런 건 아니다. 주위에 다른 직군에서 이런 사람들을 여럿 알게 됐는데 그 사람들도 작업 중엔 하나같이 눈이 퀭하고 스트레스에 시름시름 앓고 누가 말만 걸어도 시비로 받아들일 정도로 예민해진다. 이럴 때는 정말 세상 이렇게 못돼 먹은 사람이 있나 싶기도 하다. 그러다가도 썩 괜찮은 결과물을 내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생글생글 웃으면서 피부에 광택까지 돈다. 미안하지만 나는 당신들의 강박이 좋다. 피가 마르는 짓이긴 해도 그렇게 강박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주위에 이렇게 까칠한 사람들만 남았나 싶기도 하고.
우린 그저 열심히 만들어서 내보이는 요리에 머리카락을 빠뜨리고 싶지 않은 거다. 그리고 멀찌감치 서서 그 요리를 맛있게 먹어주는 손님을 쳐다보고 싶은 거다. 음식에 머리카락을 빠뜨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어서 아직도 그것들만 생각하면 온몸의 털이 쭈뼛 선다. 그래서 손님이 만족스럽게 식사를 마치는 모습을 끝까지 보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쉬고 웃는다. 그게 우리에게는 보상이다.
내가 번역했다는 것 따윈 몰라줘도 상관없다. 누군가의 인생 영화, 누군가에게 소중한 영화를 내가 번역할 수 있었다는 감사함과 뿌듯함이면 충분하다. 영화 한 그릇 만족스럽게 먹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면 그걸로 됐다. 나는 참 괜찮은 직업을 골랐다.
- 같은 책 꼭지 ‘영화 번역가로서 가장 기분 좋은 순간’ 중에서
반하지 않을 수 없다. 자신의 일에 이토록 진심인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