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입 밖으로 표현하는 것 그리고 그 후
사범대학 영어교육과에 입학했습니다. 아마 대학교 1학년 때가 처음인 것 같아요. 영어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을 한 것 말입니다.
교양 영어 시간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자신의 미래 비전, 꿈, 목표에 대해 영어로 발표하는 것이었어요. 저에겐 너무나 쉬운 주제였습니다. 앞으로 나는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이런 것들을 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는 미래의 '나'가 아주 명확했기 때문이죠.
중등 영어 임용고시 합격, 매일 영어를 공부하는 교사, 끊임없이 영어 교육, 교수법, 학생 지도 등을 연구하는 교사, 영국이나 미국 석사 유학 등등. 제가 갖고 있던 포부에 대해 멋있게 영어로 발표하고 내려와야겠다는 다짐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프레젠테이션 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말하지만 걱정할 게 없었습니다. 너무나 명확했으니까요. 결국, 이 과제를 잘 마치기 위해서는 그 내용을 교수님, 그 수업을 함께 듣는 학생들 즉, 청자가 잘 이해하도록 논리적으로 설득력 있게 영어로 잘 전달하는 것만 남은 셈이죠.
먼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스크립트로 작성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입으로 소리 내어 읽어보며 너무 문어체스럽거나, 너무 장문인 부분들은 좀 더 일상 표현들로 바꾸거나 짧은 단문으로 고쳤습니다. 중간중간, 농담들도 욕심내어 끼워 넣어보기도 하고요.
아무리 영어를 원어민에 가깝게 구사할 줄 알더라도 스크립트를 작성하고 외우는 과정은 필요합니다. 친구나 동료 등과 편한 사람들과 일상 속 대화를 하는 자리였다면 자유롭게 내가 아는 표현을 쓰며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표현을 고치거나 의문점을 물어보기도 하며 대화를 편하게 구성해 가면 됩니다. 그러나, 비교적 일방적으로 나의 생각을 전달하는 발표라면 청자의 입장에서 이해하기 쉽도록 나의 의견과 근거를 논리적으로 구성하고, 좀 더 쉬운 표현을 사용하며, 되도록 짧은 문장으로 말할 필요가 있으니까요.
이 과정 없이 프레젠테이션에서 즉흥적으로 자유롭게 발표한다면 위의 과정으로 준비했을 때보다 효과적인 발표가 될 수 없을 겁니다. 예를 들면, 내 생각에 대한 이유를 바로 떠올려내기란 쉽지 않아 논리성이 결여되기 쉽고, 청자의 입장에서 고려하지 않은 표현들이 입 밖으로 나오기 쉬울 겁니다.
그렇게 완성된 스크립트를 외우는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그저 머릿속으로 대뇌었습니다. 그리고 잘 기억나지 않으면 스크립트가 적힌 종이를 슬그머니 꺼내 그 부분을 확인하고 다시 속으로 외우는 과정을 반복했습니다. 이 과정도 그렇게 많은 횟수로 반복하지는 않았습니다. 근자감 같은 게 제 뱃속부터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발표 시간도 그리 길지 않으니 '이 정도면 뭐 충분하지'라는 생각이 가득했으니까요.
발표날이 다가왔습니다. 많은 사람들 앞에 서는 것은 항상 떨리는 일입니다.
저의 차례가 다가와 무대 위에 섰습니다. 그런데 웬걸, 많은 이들의 눈을 보고 마주치니 발표할 내용이 잘 생각나질 않더군요. 무대체질인 저는 가까스로 발화 속도를 자연스럽게 늦춰가며 다음 내용을 억지로 떠올렸습니다.
무대를 내려오며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더 잘할 수 있었는데... 중간에 잠시 발표 내용이 생각나지 않는 바람에 당황해서 연결이 부자연스러웠던 것 같아... 하... 직접 말하면서 발표하듯이 연습을 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 중요한 깨달음을 발표가 끝난 후에야 얻다니요.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입니다. 영어 말하기로 발표를 해야 한다면 직접 그 내용을 말하면서 연습하는 것 말이죠.
그런데요. 저는 이 실수를 똑같은 방법으로 저지르고 맙니다. 그것도 중등 임용고시 3차에서요. 결국 합격자 발표날 명단에 없다는 메시지를 컴퓨터 화면으로 보고 맙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새로운 글에서 자세히 풀어보겠습니다.
둘은 천지차이입니다. 위에서 말씀드렸듯, 제 인생의 중요한 순간을 앞두고 똑같은 실수를 반복했고, 뼈저린 후회를 했었습니다.
그 괴로움을 제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똑같이 겪지 않게 하기 위해 항상 주지시킵니다.
서술형 평가를 위해서는
"머릿속으로 아는 것과 직접 써보는 것은 다릅니다.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도 직접 써보면 쓰고자 하는 단어의 스펠링조차 정확하게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니 꼭 서술형 문제를 연습할 땐 직접 문제를 풀어보듯 써봐야 합니다."
말하기 평가를 위해서는
"꼭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외워야 합니다. 그리고, 실제로 발표하듯이 가족들이나 친구들 앞에서 연습해야 합니다. 혼자서 중얼중얼 말하는 것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하는 것은 엄연히 다릅니다. 한 번의 눈 마주침으로 머릿속이 하얘질 수도 있고, 청자의 반응도 살펴 이해시키며 발표해야 하고, 제스처, 목소리 크기까지 혼자서 중얼거리는 것과는 천지차이입니다."
'자동화'라는 표현은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수많은 연습을 통해 어떤 기술이나 능력이 큰 노력 없이 자동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데요. 예를 들어, 테니스를 수십 년간 해온 프로 선수들은 라켓 그립을 잡는 법, 공을 맞히는 법, 서브 넣는 법, 스트로크, 포핸드, 백핸드 등 어떻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저절로 이루어지는 겁니다. 반면, 배운 지 얼마 되지 않은 초심자의 경우 의식적으로 자세, 그립을 잡는 법, 스트로크를 치는 법 등을 의식적으로 떠올리며 테니스를 합니다.
그런데 보통 이 자동화를 목표로 결과로 연습만을 수십 번, 수백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물론 필요한 과정이긴 합니다만, 자동화가 끝이 아닙니다. 어떤 것이 자동화되었더라도 의식적인 주의 집중은 항상 필요하니까요. 아래 인용문을 같이 보실까요? (출처: <Principles of Language Learning and Teaching> by H. Douglas Brown, chapter 10. Toward a Theory of Second Language Acquisiton, 300-301쪽)
Similarly, many automatic processes are peripheral, but some can be focal, as in the case of an accomplished pianist performing in a concert or an experienced driver paying particular attention to the road on a foggy night. It is very important to note that in virtually every act of performing something, focal and peripheral attention actually occur simultaneously, and the question is: What, specifically, occupies a person's focal and peripheral attention? So, for example, a very young child who says to a parent "Nobody don't like me" is undoubtedly focally attending to conveying emotion, mental anguish, or loneliness, and peripherally attending to words and morphemes that underlie the central meaning. Other factors that garner attention somewhere in between centrally focal and extremely peripheral maybe reading the parent's facial features, mental recall of an uncomfortable incident of rejection, awareness of a sibling overhearing the communication, and even such peripheral nonlinguistic, noncognitive factors as the temperature in the room at the moment, a light in the background, the smell of dinner cooking, or the warmth of the parent's arms enfolding the child. All of these perceptioins, from highly focal to very peripheral, are within the awareness of the child.
요약해 보면, 많은 자동화된 처리는 지엽적인 집중으로 이루어지지만, 가끔 중점적인 집중이 필요할 때가 있다. 예를 들면, 콘서트에서 숙련된 피아니스트가 연주를 할 때, 노련한 운전자가 안개 낀 날 밤 도로에 특히 집중을 할 때처럼. 가상적으로 모든 활동에는 중점적인(focal) 집중과 지엽적인(peripheral) 집중이 동시에 일어난다. 그렇다면 질문! 특히 무엇이 한 사람의 중점적인 집중과 지엽적인 집중을 점령할까? 예를 들어보자. 부모에게 "누구도 날 좋아하지 않아요"라고 말할 때 그 어린아이는 자신의 감정, 정신적 노여움 또는 외로움을 전달하는데 중점적인 집중을 한다. 그러한 주요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어 의미 아래에 존재하는 단어들, 형태소들에는 지엽적인 집중을 할 것이다. 중점적인 집중과 지엽적인 집중 그 사이 어딘가의 집중을 필요로 하는 요소들은 부모의 표정을 읽는 것, 거절당해 본 불쾌한 경험을 떠올리는 것, 형제자매가 나와 부모 사이의 대화를 엿듣고 있는 것을 눈치채는 것, 심지어 비언어적이고 비인지적인 요소들, 예를 들면 그 당시 방의 온도, 조명, 저녁 식사 요리로 인한 냄새, 나를 안고 있는 부모의 따뜻한 팔 등이 해당될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인지들은 고도로 중점적인 집중부터 아주 지엽적인 집중까지 그 아이의 인지(awareness)에 포함된다.
즉, 어떤 것이 자동화된다고 해서 의식적 인지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겁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많은 사람들 앞에서 발표해야 할 때, 나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질 때는 아무리 숙련된 활동이라도 중점적인 집중을 해 잘 해내야 합니다. 위의 피아니스트처럼요.
수많은 연습은 자동화를 위해 꼭 필요한 과정입니다. 영어로 프레젠테이션을 잘 해내기 위해서는 프레젠테이션이 이루어지는 상황과 같거나 비슷한 상황에서 수많은 연습과 반복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프레젠테이션 당일에도 의식적인 노력과 집중을 통해 잘 해내야 합니다.
거꾸로 말해보면, 프레젠테이션 할 내용을 영어로 말하는 것에 숙련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그 시간에 내가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을 전달하는데 집중하지 않으면 머리가 순간 하얘지거나 어버버버할 수 있겠지요.
저는 이 모든 과정(자동화, 자동화 이후의 의식적인 집중)을 근거 없는 자신감 때문에 놓쳐버린 듯했습니다. 대학생 때 영어프레젠테이션 할 때는 발표가 그나마 짧은 내용이라 임기응변으로 잘 넘어갔지만, 두 번째 도전이었던 중등 임용고시 3차에서는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 했습니다.
아는 것과 행하는 것도 다르지만, 머릿속으로 다 아는 것처럼 느껴지는 것도 입 밖으로 말하고 설명하는 것은 엄연히 다른 차원입니다. 무언가를 말하고 써야 한다면 집중한 상태에서 수많은 반복 과정으로 자동화를 이루어내야 하며, 그 이후에도 집중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결국 몰입과 집중은 많은 순간에 필요한 요소입니다. 특히 시험과 같은 평가의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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