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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riting Choenghee Jul 23. 2023

나의 섬집아기 노래를 듣고 왜 울었을까?

딸을 정서적으로 독립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

 딸을 재우려고 동요 섬집아기를 불러주었다. 원래 딸의 자장가는 섬집아기가 아니라 클래식 자장가이다. 신생아 때부터 유튜브에서 클래식 자장가를 틀어주면 곧잘 잠들곤 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왜인지 섬집아기를 부르게 되었다. 깜깜한 밤, 노란 조명을 켜고 딸을 안고 누워있으니 이유 모를 동요가 내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첫 소절을 부르는데 딸이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울먹울먹 거렸다. 처음엔 잠투정일 것이라고 생각하며 노래를 계속 이어나갔다. 그랬더니 딸의 눈에 금세 눈물이 차오르고 우는 게 아닌가.


 잠투정이 아닌 것 같아 잠시 노래를 멈추어보았다. 그랬더니 울먹거리던 눈도, 눈썹도, 입도 다시 딸의 사랑스러운 얼굴로 되돌아갔다. 그러고 나서, 다시 노래를 부르기 시작해 보았다. 그랬더니, 또 울먹거리며 눈에 눈물이 차올랐다. 잠투정이 아니었다. 딸이 울게 된 이유는 섬집아기라는 동요 때문이었다.


 궁금해졌다. 딸이 왜 동요를 듣고 울었는지. 섬집아기라는 동요의 가사 내용을 인지적으로는 아직 모를 11개월 차 아기이다. 한글을 아직 모르고 가사가 이런 뜻이라는 걸 가르친 적도 없으니까. 섬집아기가 자장가로 잘 불리는 동요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다. 아기들이 이 동요만 들으면 잠에 잘 든다고 한다. 그런데 딸은 왜 울기까지 했을까.




 생각을 거듭하다 떠오른 하루가 있었다. 딸이 6개월 될 즈음이었나. 그날도 밤에 딸을 재우려고 섬집아기를 불러줬던 기억이 있다. 클래식 자장가에 익숙해졌는지 음악을 틀어줘도 유독 잠에 들지 않아 딸을 안고 느리게 둥가둥가하며 섬집아기를 불러줬었다. 그런데 괜히 내 눈시울이 붉어지며 눈물이 났다. 섬집아기 가사의 내용이 슬펐다. 가난하고 배고픈 시절, 엄마는 아기를 집에 혼자 두고 바다로 굴을 따러 간다. 아기는 파도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일하러 갔던 엄마는 갈매기 울음소리에 혼자 울고 있을지도 모를 자식 생각이 나 굴 바구니를 덜 채우고도 다시 집으로 향한다는 내용이다.   


 그날, 섬집아기 동요의 가사가 눈앞에 펼쳐지면서 나중에 복직할 시기에 어린이집에 보내는 장면이 갑자기 겹쳐졌다. 딸이 아니라 엄마인 내가 벌써부터 분리불안을 느끼는 것 같았다. 울고 있는 나를 보고 남편은 당황스러워했다. 출산하면 호르몬의 변화로 눈물이 많아진다더니 그것 때문인가 하면서 애써 이성적인 말로 내 감성을 제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는 듯이.


 그날의 내 감정이 딸에게 전이된 것일까. 도무지 생각해 봐도 딸이 섬집아기를 듣고 울 이유까지는 없었다. 많은 육아서들에서 아기는 태어나기 전부터 약 300일 동안 신체적으로 이미 엄마의 몸 안에서 탯줄로 연결되어 있고 심리적, 정서적으로도 연결되어 있다고 한다. 그래서, 아기를 배에 품고 있는 동안 엄마가 느끼는 행복감, 우울감, 스트레스 등의 감정이 아기에게도 전달되며, 엄마는 태교로 아기와 교감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태어나서는 엄마의 냄새를 본능적으로 알고, 엄마 품을 인식하며, 엄마를 자신의 일부로까지 여긴다고 한다. 딸이 운 이유는 자신과 거의 동일시하는 엄마가 섬집아기를 부르며 울었던 그날의 그 감정을 같은 날 딸도 느낀 것 때문 아닐까. 똑같은 노래가 다른 날 들리니 그때 느낀 그 감정이 자연스럽게 떠오른 게 아닐까.




 딸이 섬집아기를 듣고 운 이유를 이토록 찾으려는 집착을 보이는 이유는 내 안에 있다. 딸을 이러이러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꾸준히 하고 있는데 그중 명확한 하나는 딸을 정서적으로 독립된 사람으로 키우고 싶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딸에게 엄마인 나의 감정과 기분을 투영시키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온전히 자신의 기분과 감정을 먼저 알아차리고 그 감정 상태를 스스로 조절하는데 집중하며 발전하는 시간으로 딸의 성장기를 꽉 채워주고 싶다. 엄마가 지금 화가 난 건 아닌지, 엄마가 지금 슬퍼하고 있는 건 아닌지. 지쳐있는 건 아닌지 등등 엄마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엄마의 감정을 우선적으로 살피는 딸은 나였다. 엄마와 아빠의 갈등이 많았던 어린 시절, 엄마는 항상 나에게 아빠 얘기를 많이 했었고, 자신의 감정들을 해소했다. 어릴 때는 그런 엄마가 안돼보였다. 그래서, 엄마를 보호해주고 싶었다. 그렇게 아이임에도 어른처럼 엄마의 감정 상태를 먼저 체크하고 달래주고 싶었다. 성인이 되니 그런 나도 지쳐갔다. 오랜 시간 동안 엄마의 감정을 받아주느라 내 감정은 뒷전에 있었고, 뒤늦게 억울했던 감정들이 앞으로 나오겠다고 터져 나왔다.


 딸은 온전히 자신의 발로 서서, 스스로를 중심에 두고, 자신의 감정을 먼저 인지하고 조절하고 절제하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 어른아이가 아니라 아이일 땐 아이로, 청소년일 땐 청소년으로, 성인일 땐 성인으로, 그렇게 계절에 맞게 겪고, 느끼고, 생각하며, 성장하는 한 사람으로 살아갔으면 좋겠다.




 물론, 타인의 감정을 공감하고 배려하는 것도 중요하다. 그렇다고 감정 해소의 통로나 배출구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글 제목 이미지 출처: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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