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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Jul 09. 2024

양인심사양인지

달밤의 데이트

낮에 들었던 점쟁이 말이 되살아나 귓속에서 찌르르 울렸다. 화장대 앞에 앉아 크림을 찍어 바르다 말고 거울 속 얼굴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다고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이 정도면 아주 밉상도 아니구먼.’ 거울을 파고 들어갈 기세로 가까이 얼굴을 들이대며 다시 한번 눈, 코, 입을 차근차근 훑어보았다. 

낮에 지인을 따라서 재미 삼아 점집에 들렀다. 이런저런 말이 오가던 중 늙수그레한 점쟁이가 버젓이 남편이 살아있는 지인에게 애인이 생긴다고 했다. 지인의 입꼬리가 살구색 미소와 함께 살그머니 올라갔다. ‘그럼 나도 혹시?’ 해서 물어보려던 참이었다. 입을 떼기도 전에 점쟁이가 나에게 “댁은 절대로 남자 친구 같은 건 안 생겨.”라고 하지 않는가. 

내 물음을 알아차린 점쟁이처럼 내 마음을 다 안다는 듯 동쪽 창문 위에는 초저녁달이 배시시 웃으며 떠올라 있었다. 나는 밤하늘 은은한 달빛을 따라 조선의 어느 기와집 담장 아래로 유유히 흘러 들어갔다. 
  

달빛마저 희미한 한밤중 어느 집 담장 아래서 쓰개치마를 쓴 여인과 초롱불을 든 남자가 만나고 있다. 눈썹달이 이들을 비추고 있고 밤은 깊어 삼경인데 남녀는 지금 막 만나고 있는 것인지 이제 이별을 하려는 중인지 알 수가 없다. 두 사람은 어떤 신분이고 이들 사이에 얽힌 사연 또한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해설이 있다. 이 그림은 혜원 신윤복의 「월하정인」이다.     

미술평론가 손철주 선생의 해설은 이렇다. ‘달빛 아래 정든 연인’이라는 뜻의 「월하정인」은 혜원의 유명한 그림이다. 기와집의 담벼락에 등불을 들고 있는 남자와 쓰개치마를 쓴 여성이 있다. 여성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있다. 쉽게 말해 달밤에 데이트하는 장면이다. 「월하정인」은 상봉의 장면이 아닌 이별의 장면이다. 남자의 발길이 어디를 향해 있는지 보라. 날이 밝아 헤어져야 하는데, 여자를 두고 발길을 돌리려니 가슴이 아려온다. 그런 남자는 한 손을 안 주머니에 찔러 넣어 무엇인가를 찾고 있다. 정표라도 꺼내주려 하는 걸까. 그리고 쓰개치마를 쓴 여성은 헤어짐이 섭섭한 듯 다소곳이 고개를 숙이고 있다.            

오늘은 이 그림에 딴지를 걸고 싶다. 쭉 치켜 올라간 눈썹과 한쪽 입꼬리만 슬쩍 올린 미소와 얄상한 얼굴형과 붉은 입술로 보아 이 남자는 불량한 남자일 게 분명하다. 자칭 조선의 로맨티시스트라고 하겠지만 시쳇말로 불량기 가득한 바람둥이일 게 뻔하다. 초롱을 든 남자는 무엇이 급한지 몸을 돌려 달아나려 하고 있다. 정표를 찾는다는 한 손은 어쩌면 또 다른 여인과의 약속 때문에 휴대전화를 찾는 것일지 모른다. 반면 여자는 남자를 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몸을 비슷하게 돌려 부끄러운 듯 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있다. 하늘의 달을 닮은 눈썹과 아래로 내리뜬 다소곳한 눈매와 꼭 다문 앵두 같은 작은 입술이 애처롭다. 순정을 바친 여인의 모습이다. 마실을 간다며 남편에게 거짓말을 하고 집에서 나왔을 성싶은 여인은 이별의 순간을 몹시 아쉬워하고 있다. 남자의 속마음을 모르는 여자는 이 남자를 지금 보내고 싶어 하지 않는다. 여자의 마음을 알면서도 또 다른 여자를 찾아가고픈 남자. 한마디로 남자와 여자는 각기 다른 생각을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어쩌면 혜원은 그림에 이런 제발(題跋: 그림에 쓰인 글귀)을 적었는지도 모른다.       

       

月下沈夜三更(월하침야삼경)

兩人心事兩人知(양인심사양인지)     

달은 기울어 삼경인데  

두 사람의 마음이야 그들만이 알겠지      



바야흐로 가을이다. 낙엽이 지고 달빛이 차가워지는 계절이다. 옆구리를 파고드는 바람이 서늘하다. 어디선가 플라타너스는 넓은 잎을 떨어뜨리고 있을 테다. 자칭 로맨티시스트라는 남자와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는 어느 여인의 가슴속에서도 툭, 소리를 내며 무거운 낙엽 하나가 떨어지고 있을 테다. 은은한 가을 달빛 아래 은밀한 로맨스를 꿈꾸는 여인이여, 코트 깃을 세우고 커피 향을 날려주는 그대의 남자가 진정한 로맨티시스트인지 곰곰이 생각해 볼지어다.     

창문 위에 걸려있던 달은 하늘 한가운데까지 떠올라 그림 속 여자의 마음도 남자의 속마음도 모조리 다 알고 있다는 듯 동그란 미소를 보내주고 있다. 

지금은 야삼경. 애인이 생긴다는 점쟁이 말에 얼굴 가득 크림을 듬뿍 바르고 있을지 모를 지인과 아직도 남자가 자기만 사랑할 거라 믿고 싶어 할 그림 속 쓰개치마를 둘러쓴 여인이, 훗날 덜그럭덜그럭 설거지하면서 오로지 그녀들의 애인만을 향해 구시렁거리게 될 것 같은 글귀를 떠올려 본다. 짧지만 아릿한 여운을 주는 황경신의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속의 문장을 남기며 나는 이 글을 맺으려 한다. 


“당신은 감정을 다루는 데 익숙하지만, 감정에 대해 책임지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마도 당신은 아무것도 잃어버리지 않고 제자리로 돌아가리라. 모든 결론을 유보하고, 어떤 결정도 내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로맨스는 로맨티시스트에 의해 창조될지 몰라도, 로맨티시스트는 로맨스를 위해 희생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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