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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은실 Sep 03. 2024

편지

가을엔 손편지 써 보실래요?

라디오에서 어니언스의 「편지」라는 노래가 흘러나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스피커를 타고 퍼져 나오는 오선지 위 음표 중 하나가 하늘로 튕겨 솟아오르며 나를 단박에 단발머리 여중생으로 돌려놓았다.           
  

편지요!” 집배원 아저씨 목소리다. 행여 누가 받아볼세라 서둘러 대문 밖으로 뛰어나갔다. 대문 옆 나무 기둥 문패 아래 작은 우편함이 버젓이 붙어있건만 집배원 아저씨는 대문 밖에서 크게 소리를 질러댔다. 다른 서신이 올 때는 우편함에 넣거나  대문 틈 사이에 얌전히 끼워놓고 가면서 내게 편지가 오면 꼭 그렇게 외쳐댔다. 발그레한 얼굴로 받아 든 하얀 봉투 위에는 새나 꽃 사진 우표가 붙어있고 우체국 소인이 동그랗게 찍혀있었다. 빙그레 웃는 아저씨 모습이 저만치 멀어지면 편지를 쥐어 들고 뒤꼍으로 돌아가 장독대 옆에 앉았다.

조심스레 편지를 열어보노라면 한여름 더위를 이겨내고 있던 셀대로 센 쑥들이, 풋내기들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듯 얄궂게 웃으며 짙푸른 향을 날려주곤 했었다. 별들이 소곤대는 밤, 나는 책상머리에 앉아 답장을 썼다. 낮은 촉수의 전기스탠드를 켜놓고 하얀 편지지 위에 ‘K에게’라는 첫 줄을 시작으로 푸른색 잉크를 펜촉에 묻혀가며 또박또박 써 내려갔다. FM 라디오에서는 알지도 못하는 팝송이 주절주절 흘러나왔고 그 옆에서는 손님 올 때만 내오던 시커먼 커피가 하얀 크림과 섞여 투박한 사기잔에서 식어가고 있었다. 그때 나는 양쪽 볼 위에 여드름 서너 개가 돋아 오르던 볼 빨간 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었다. K는 부반장인 나와 가끔씩 학급 일을 의논하던 우리 반 반장이었다.

그해 봄 소풍날이었다. 소풍 장소래야 해마다 가는 영릉(경기 여주시 세종대왕면 소재 세종 대왕 능)일게 뻔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소풍을 기다렸다. 영릉 뒷산 어디쯤에서 전교생이 모여 장기 자랑을 시작했다. K는 우리 반 대표로 노래를 부르기 위해 앞으로 걸어 나갔다. 몸을 옆으로 살짝 비켜 세우고 한 손을 마이크 잡듯 입 가까이에 가져다 댄 그가 부른 노래는 다름 아닌 「편지」였다. 한껏 분위기를 잡고 조용조용 노래를 부르는 그를 바라보며 우리 반 아이들도 흥얼흥얼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을 때였다. “뻥 뚫린 내 가슴에…” 이 대목에서 그는 두 손을 쭉 뻗어 펼치면서 아주 강하게 소리를 높였다. 뻥 소리가 얼마나 우렁찼던지…. 그 바람에 푸름으로 가득했던 온 산이 금세 웃음바다로 변해버렸다. 모두들 까르륵 웃고 있던  순간에 나는 그 애와 조금 더 친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만 고개를 푹 수그리고 말았다.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여름방학이 시작되었고 길지도 않은 방학 동안 K와 나는  두서너 통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었다. 자전거로 달리면 30여 분 걸릴 멀리도 않은 거리를 두고 지내면서 편지요 하는 소리를 기다리고 기다렸던 우리들의 사춘기는 철 늦은 매미 소리와 함께 그렇게 영글어 가고 있었다.          
  

애잔하게 튕겨 나오는 통기타 소리에 언젠가 읽고 아껴두었던 가슴 설레게 하는 짧은 이야기 하나가 살며시 고개를 내민다.     

러시아 작가 체호프를 사랑했던 아뷔로 부인이 기차 여행을 할 때의 일이다. 기차가 체호프의 집 앞을 지나게 되자 그녀는 느닷없이 그가 그리워졌다. 가까운 역에 다다른 그녀는 간단한 편지를 써서 심부름꾼에게 전해달라고 부탁하며 은전 한 닢을 주었다. 편지를 받아 든 체호프는 편지 사연을 읽으려고 애써보았으나 편지지가 심부름꾼의 손때와 땀에 젖어 버려서 간신히 아뷔로란 서명만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고 심부름꾼이 대가로 받았던 은전 한 닢을 내놓으려고 하자 체호프는 빙그레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럴 필요 없네. 그녀의 이름만 보아도 충분하니까.”    
  

아무리 기억하려 해도 K와 주고받은 편지 사연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다. 사연은 온데간데없고 편지를 받고 설레었던 심장의 두근거림만이 긴 시간이 흘러갔음에도 여전히 남아있다. 나도 체호프처럼 겉봉투에 쓰인 K의 이름만으로 충분했던 것일까.    


편지라는 글, 그것은 오로지 한 사람만을 위해 쓰는 글이다. 받아 읽는 사람만이 밤새워 읽다 품에 안고 잠드는 글이다. 꾹꾹 눌러쓴 하얀 종이 위 사연이 고급 실크처럼 반지르르하지 않아도 괜찮다. 아니 오히려 서툴고 투박해야 한다. 내용을 쓰고 버튼을 눌러 톡 하고 보내기까지 1분도 걸리지 않는 인정머리 없는 글은 편지가 아니다. 빨간 우체통에 들어가서 족히 사나흘은 기다려야 하는 글이 편지다.

“편지요!” 하는 싱그러운 목소리와 쓰는 이의 진심을 표시하는 듯한 우체국 소인이 쾅 찍힌 하얀 손 편지가 몹시도 그립다. 하릴없이 현관 앞을 서성이다 절대 채워져 있을 리 없는 우편함을 슬며시 들춰 보게 되는 초가을날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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