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나도 허물을 벗고 싶어서였는지 모르겠다. 찜질방 문을 열고 들어섰다. 어두침침한 방 안에는 여자들 둘이 이미 자리를 차지하고 뱀처럼 길게 드러누워 있었다. 하나는 알록달록한 두건을 쓰고 있어서인지 꽃뱀이라 불리는 유혈목이 같았다. 다른 하나는 찜질방 수건을 머리와 목에 두르고 있어서 그런지 줄무늬 까치살모사 느낌이 났다.
출입구 쪽에 자리한 이 방은 어른 열 명 정도가 누우면 꽉 찰 정도의 규모로 온도가 일반 가정집 안방보다 높은 40도 정도다. 한 계단 올라 문짝 없는 문을 통과하면 발바닥도 디딜 수 없을 정도의 뜨거운 방이 나온다. 이 방도 크기는 비슷했다. 50도가 넘는 이 고온 방에도 역시 뱀 두 마리가 있었다.
그중 한 마리는 덩치가 산만 한 게 큰능구렁이 같았다. 직접 챙겨 온 도톰한 수건을 깔고 덮고 길게 누워 이 방이 제집 안방이라도 된다는 양 편안하게 잠들어 있었다. 맵싸한 추위가 닥친 날에 외부에서 밤 근무라도 했나 싶어 능구렁이가 측은했다. 또 다른 하나는 똬리를 틀듯 가부좌를 하고 꼿꼿이 앉아있었다. 이 여자는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 불공을 드리는이무기 같았다. 무슨 기도가 저리도 지극할까 싶어 이 뱀 또한 측은했다.
그녀들과 비교하면 너덧 살은 어리고 날씬한 데다, 미동도 하지 않는 뱀들과 달리 두 갈래 혀를 날름거리며 이 상황을 탐색하고 있는 나는 초록 물뱀이었다. 물뱀은 매점에서 산 아이스커피를 들고 까치발로 고온 방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커피 통을 살짝 흔들어 새로운 뱀의 출현을 알렸다. 샤그락 얼음 부딪치는 소리가 바람결에 흔들리는 풍경 소리처럼 침침하고 무거운 방 안에 맑게 퍼졌다. 매서운 추위에 뻣뻣하게 굳은 관절을 펴보려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아래 저온 방에 있던 뱀들은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었다. 꽃뱀은 인기 드라마 「재벌 집 막내아들」을 정주행 중이란다. 까치살모사는 옛날 인기 연예인들이 나오는 토크 프로그램을 시청한다며 누구는 남편 노름빚을 갚느라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고 또 누구는 암 투병하느라 재산을 탕진했다는 이야기로 점점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초록 뱀이 그들의 이야기에 한창 촉을 세우던 중이었다. 그때 이쪽 방에서 잠을 자고 있던 능구렁이가 갑자기 큰소리를 냈다.
“거, 조용히 하라고!” 그 소리에 물뱀은 저온 방으로 뻗어가던 촉을 황급히 거두어들였다. 저온 방에 있던 꽃뱀은 알았다며 순순히 대답했다. 그렇지만 목소리만 낮추었을 뿐 그들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그러다 몇 분도 채 지나지 않아 유혈목이와 까치살모사의 목소리는 원래대로 커지고 말았다. 구경 중 제일이 불구경, 싸움 구경이라던가. 불같이 뜨거운 찜질방에서 활활 타오르는 여자들 싸움이라니.물뱀은 좋은 구경거리를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으로 거두었던 촉을 슬그머니 다시 내려놓고 스트레칭을 이어갔다. 잠시 후 구렁이는 “떠들려면 나가라!”며 마치 조폭 우두머리라도 되는 듯 낮고 근엄한 목소리로 아랫방을 향해 으름장을 놓았다. 일순간 찜질방 안에 냉기가 서렸다. 구렁이의 목소리에 압도당한 물뱀은 아이스커피 통을 흔들어 샤그락 얼음 부딪는 소리를 내려다 말고 통을 바닥에 살며시 내려놓았다. 자기 딴에는 대단히 오래 참았다고 생각했는지 까치살모사가 쏘아붙였다.
“자려면 수면 방으로 가야지!” 초록 물뱀 머릿속이 부산스러워졌다. 처음에는 잡담하는 뱀들이 옳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듣고 보니 잘 사람은 수면실로 가야 한다는 말도 틀린 말이 아닌 것 같았다. 물뱀은 과하게 흘린 땀에 갈증이 났지만 이쪽으로 불똥이 튈까 싶어 커피 통을 바라만 보았다. 냉커피도 긴장했는지 통 표면에서는 물방울이 식은땀처럼 배어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신기하게도 승천보다 더한 열반에라도 들 작정을 했는지, 면벽수행을 하는 고승처럼 이무기의 자세는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고 오히려 더욱 꼿꼿해졌다.
물뱀이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저온 방 뱀들은 시퍼렇던 서슬을 풀고 꼬리를 끌며 스르륵 밖으로 나가버렸다. 잠시 후 구렁이도 허물을 벗듯 수건을 널브려 놓은 채로 문을 열고 나갔다. 밖으로 나간 저들이 2차전이라도 벌이나 싶어 아랫방으로 내려가 문을 열어보았지만, 예상과 달리 밖은 조용했다.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찜질방을 훑어보았다. 저온 방에서 고온 방으로 발을 올리려는 찰나에 천장 아래 벽에 붙어있는 글자를 발견했다. 이무기가 앉아있는 방의 벽 위 희미한 조명 아래 ‘정숙’이라는 글자가 엄숙하게 쓰여있었다. 그녀들은 땀을 흘리며 무데뽀를 감춰주던 허물도 벗어버린 모양이다.
십이지 중 여섯 번째인 뱀은 탈피하는 동물이다. 뱀이 허물을 벗으면 피부가 비단결처럼 고와진다. 그렇지만 벗지 못하면 허물이 딱딱하게 굳어 끝내 죽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뱀은 부활이나 재탄생을 상징하고 불교에서는 지혜를 상징하기도 한다. 대문호 괴테는 자신을 뱀과 같은 존재로 생각했다고 한다. 언제나 새로움을 시도한다는 뜻이다. 살아간다는 건 부단히 허물을 벗는 일은 아닐까. 그럼으로써 굳어지지 않고 새롭고 부드러운 지혜를 터득하는 건 아닐까. 관절은 물렁물렁해지고 피부는 부드러워졌지만, 삶의 거룩한 지혜를 터득하지 못한 물뱀은 사족蛇足 같은 이야기를 주섬주섬 챙기며 찜질방을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