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훔치고 들키고

글쓰기 비법 공개

by 박은실 Mar 12. 2024

“요즘도 글 써? 그러잖아도 머리 아픈 세상에 골칫덩어리 글은 뭐 하러 옆에 끼고 사는 건데? 글이란 게 대체 너에게 뭐냐구?”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물어오는 너의 목소리에 어안이 벙벙했어. 1년 내내 책 한 권도 안 읽는 네가 물을 말이 아닌 것 같았거든. 너의 질문은 (나에게) 도대체 사랑이 무어냐고 묻는 거와 비슷해서 하마터면 눈물의 씨앗이라고 말할 뻔했잖아. 휴대폰 문자도 긴 건 읽기 싫다는 너였기에 “글이 어디 머리로 쓰는 거라디? 한 줄을 써도 가슴으로 쓰는 거지.”라며 웃어넘기고 말았잖아. 그런데 그렇게 대충 얼버무리고 나니 입 안이 심심한 게 꼭 간장 없이 맨밥만 먹은 느낌이 들었어. 말 난 김에 내가 조곤조곤 설명해 줄 테니 잘 들어봐.     
  

어릴 적 시골집은 무척 추웠어. 하지만 할아버지가 쓰던 방은 언제나 훈훈했지. 겨울 참새처럼 옹기종기 모여 앉아 짹짹이는 어린것들의 종알거림 때문이었을까. 나도 할아버지 방에서 부스럭거리며 늘 무언가를 하며 놀곤 했지. 할아버지 방에는 특이한 문이 있었는데 그 문은 사람이 드나들 수 없을 만큼 작았어. 창호지를 바른 문이었는데 요즘 집에 비유하자면 높이가 낮은 창문이라고 생각하면 맞을 거야. 그 작은 문의 창호지를 떼어낸 자리에는 어림잡아 어른 손바닥만 한 투명 유리가 붙어있었어. 춥디 추운 겨울날 밖에서 무슨 소리가 나기라도 하면 나가봐야 할 텐데 그때마다 커다란 방문을 열면 방 안 온기는 삽시간에 빠져나갈 테지. 그래서 지나가는 바람이 온 건지  사람이 온 건지 일단 한번 보는 용으로 만들어 놓은 거였어. 그러니까 방 안에서 바깥을 내다볼 용도로 유리를 붙여놓은 거란 말이지. 그런데 나는 말이야, 방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게 영 재미가 없더라구. 반대로 밖에서 안을 훔쳐보는 게 그렇게 재밌을 수가 없었어. 차가운 마룻바닥에 무릎을 꿇고 코가 유리에 눌려 납작코가 될 만큼 두 눈을 유리 가까이에 가져다 대고 방 안을 훔쳐보곤 했어. 엉덩이를 이쪽으로 돌리면 윗목이 시야에 들어왔는데 할머니가 시집올 때 해왔음 직한 낡은 반닫이와 그 위에 점잖게 다리를 접고 앉아있는 흑백 TV가 보였지. 하루 종일 조잘대는 모습이 말 많은 아주머니 같은 TV야 그렇다 쳐도 자물쇠까지 단 채로 입을 꾹 다물고 있는 반닫이 속이 얼마나 궁금하던지. 반닫이 아래에는 일감에 치어 고단해 보이는 나무 실패가 할머니 바느질감 위에 올려져 있기도 했어. 엉덩이를 반대쪽으로 홱 돌리면 대단히 거만하고도 고독해 보이는 네모반듯한 할아버지의 퇴침이 아랫목에 있는 게 보였어. 그 옆에는 할아버지가 읽다가 만 세상 이치를 다 아는 도사님 같은 누런 표지 옛날 책이 시치미를 뚝 떼고 방바닥에 놓여있었지. 방 안에서 볼 땐 뭉뚱그려져 별것도 아니었던 소품들이 밖에서 작은 유리로 들여다볼 때는 각각의 모습으로 한 개씩 클로즈업되어 다가왔어. 나는 그런 방 안을 훔쳐보는 게 얼마나 재미있던지 밖이 추운데도, 할머니께 꾸중을 들으면서도 그 짓을 자주 하곤 했단다. 앞서도 말했지만 안에서 밖을 내다보는 건 재미가 없었거든. 눈을 유리에 가져다 대봤자 보이는 건 추위를 한가득 부려놓은 겨울 마당과 그 추위에 떨며 마당 한편에 우두커니 서있는 싸리 빗자루가 전부였거든. 엉덩이를 이리저리 돌리며 봐야 할 만큼 궁금하지도 않았고 더구나 은밀하지도 않았어. 그렇지만 작은 유리를 통해 보이는 방 안은 약간은 어두운 듯했고 따뜻하면서 은은하고 비밀스럽게 느껴졌어.      

지금 너는 이렇게 얘기가 길어질 줄 모르고 괜한 걸 물었다며 너의 실수를 인정하고 있겠지. 지루해할 너를 생각하니 웃음이 절로 나오네. 지금부터 결론으로 들어가니까 잘 들어봐.   


숙아, 음…. 나에게 글이란 훔치고 들키는 것이라 말하고 싶어. 그것처럼 재미난 것이 세상에 또 있을까.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슬금슬금 무릎으로 기어 나와서 원고지 위에 오로로 토해놓은 삶의 씨앗들. 갖가지 씨앗을 모아둔 남의 방 안이 너무도 궁금해 다가가서 들여다보는 것. 더는 어쩌지 못해 끄적여 놓은 소중함을 훔쳐보고 싶어서 나는 글을 읽는단다. 어릴 적 방 안의 이것저것을 궁금해하며 작은 문 유리에 코를 박았던 것처럼 말이야.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 내 방 안을 보여주고 방 안의 소품 같은 내 속의 씨앗들을 한 개 한 개씩 야금야금 들키고 싶어서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단다. 내 책을 집어 든 어떤 사람이 그 속이 너무도 궁금해 집에 갈 때까지 기다리지 못하고, 버스 안에서 떨리는 손으로 책장을 넘길 만큼, 은밀한 내 씨앗들도 남들에게 더없이 흥미로웠으면 좋겠어. 가방 속에 구겨 넣고 다니다 어느 카페 구석진 자리에서 읽고서는 ‘간장 없이 맨밥만 먹었는데도 엄청나게 고소하네.’라며 입맛을 다셨으면 좋겠어.    
  

커피값 안 들이고 수다 한번 길게 떨었네. 지루함에 휴대폰을 귀에서 여러 번 뗐다 붙였다 했을 네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래도 어쩌겠누. 여고 시절, 나이 들어도 가슴속에 마르지 않을 우물이 남아있을 거라며 글 쓰는 게 어울릴 것 같다고 처음으로 나에게 말해준 사람이 너였으니. 그러고 보니 고마웠던 그 말빚을 아주 지루하게  갚게 된 셈인가?      

숙아, 골치 아픈 얘기 들어주느라 고생했으니까 다음에 내가 진한 커피 한잔 사줄게. 안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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