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한강의 소설로 메디치 수상작이다. 나는 과연 애국자인가 자문해 보았다. 역사를 자세히 잘 모른다고 해서 애국자가 아닌건 아닐테지만 부끄러운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다만, 대한민국국민으로서 이 나라가 아무렇게나 흘러가는 건 원치 않는다.
제주 4.3 사태가 이런 것이었는지 조금 알게 되었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세대이기에 그냥 역사 속 한 사건으로만 알고 있었던 것이 죄송스럽기까지 하다. 읽은 지 두어 달은 지났지만 아직도 가슴이 먹먹하다.
누가 이런 일을 저질렀을까. 왜 당해야만 했는가.
그렇지만 아직도 이렇다 할 이유를 나는 제대로 알지 못한다.
한강의 문장에 빠지다가 이야기에 빠지다가 제주의 눈 속에도 빠졌다.
이 책을 소개하는 이유는 이 일에 대해 나처럼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그들이나처럼 끝내 잘 모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작가 한강이 제목 《작별하지 않는다》 에서 감춰둔'...과(와)'는 과연 무엇이었을까.
읽고도 아직 또렷한 무언가가 세워지지 않은 어설픈 나는 마음에 두었던 문장을 옮기는 것으로
위안을 삼는다.
P109
어떻게 이렇게 가벼운 거야, 내가 물었을 때 인선은 자신도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무게를 줄이기 위해 새들의 뼈에는 구멍들이 뚫려 있다고, 장기 중에 제일 큰 건 풍선처럼 생긴 기낭이라고 그녀는 말했다.
새들이 조금 먹는 건 위가 정말 작아서 그런 거야. 피도 체액도 아주 조금뿐이어서, 약간만 피를 흘리거나 목이 말라도 생명이 위험해진대
P153
수십 포대의 설탕을 부어놓은 것 같은 눈이 안채에서 흘러나오는 불빛을 반사하고 있다.
P159
속솜허라
동굴에서 아버지나 가장 많이 했던 말이에요.
숨을 죽이라는 뜻이에요. 움직이지 말라는 겁니다. 아무 소리도 내지 말라는 거예요.
P233
파르스름한 씨앗 같은 불꽃의 심부가 내 눈을 응시하고 있다.
초의 기둥은 손가락 반 마디 가까이 더 녹아내렸다. 여러 가닥의 구슬 띠 같은 형상의 촛농이 식탁으로 흘러 굳어 있다.
P252
숨을 죽여야 들리는 작은 소리다. 물속에서 모래가 쓸리는 것 같은. 누군가 손끝으로 쌀알을 흩트리는 것 같은 소리가 미세히 커졌다 잦아든다. (...) 쌀알이 흩어지고 모래가 쓸리는 것 같던 소리가 조금씩 커진다. 깃털들이 스치고 퍼덕이는 소리, 삐이이 낮게 우는 소리가 새장이 있는 쪽에서, 식탁과 싱크대 쪽에서 거의 동시에 들린다. 새들이 왔나, 나는 생각한다. 그림자가 아니라 날개 근육을 움직여 활공하는, 식탁 위 갓등에서 그네를 타는 새들이.
소리가 그칠 때까지 우리는 입을 열지 않는다. 물살이 잦아들듯 소리가 희미해진다. 차츰 음량이 낮아져 휘발하는 음악의 종지부처럼, 속삭이다 말고 문득 잠든 사람의 얼굴처럼 모든 것이 고요해진다.
P286
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 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
P311
내 기척에 엄마가 돌아보고는 가만히 웃으며 내 뺨을 손바닥으로 쓸었어. 뒷머리도, 어깨도, 등도 이어서 쓰다듬었어. 뻐근한 사랑이 살갗을 타고 스며들었던 걸 기억해.
골수에 사무치고 심장이 오그라드는........ 그때 알았어. 사랑이 얼마나 무서운 고통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