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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에게

by 최재효 May 02. 2023

[에세이]










L에게     







 뭐 하니. 술 한잔 따라드리지 않고?”

 “괜찮아. 내가 따라서 마실게….”      


    

 땀을 닦으며 집에 들어선 단발머리 여학생은 청년을 보자 얼굴이 빨개졌다. L의 집은 D시 시장 한복판에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어색한 분위기를 바꾸려고 얼른 상을 준비했다. L은 조퇴를 했다고 했다.



 청년은 애써 미소를 지으며 L에게 이런저런 것을 물었고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L의 어머니가 딸이 평상시 행동과 다르다며 딸을 대변했다. 어머니는 청년에게 술 한잔 따르라고 했다.



 가로수 매미들의 합창이 유난히 크게 들렸다. L의 얼굴에 흥분이 오래도록 가시지 않은 듯했다. 그녀는 청년에게 몇가지를 물었고 청년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양 볼이 빨갛게 물든 채 L은 푸른 제복의 청년에게 술을 따랐다. 술을 따르는 가녀린 손이 가늘게 떨렸다. 술잔이 넘치고 있었지만, 청년은 술잔을 계속 들고 있었다.



 곁에서 지켜보던 L의 어머니가 얼른 맥주병을 가로채 내려놓으면서 무안해했다. 술잔과 음료수 잔이 부딪쳤다. 그녀의 부모와 청년이 정담을 이어갔고, L은 다소곳이 앉아 세 사람의 대화를 경청했다.     


     

 청년은 병영(兵營)에서 우연히 위문편지를 계기로 L과 인연이 닿아 한동안 편지를 주고받았다. 1년쯤 서신 교환이 이루어진 어느 날, 청년은 휴가 가는 길에 L의 집을 방문하기로 했고 그녀도 호응했다.



 둘의 만남은 짧았지만, 무언의 긴 대화를 나누었다. 청년은 오후 3시 서울행 열차를 예약한 상태였다. 청년은 또 연락하자는 언약을 남기고 동대구역으로 향했다. L의 아버지는 열차를 놓치면 자신의 집으로 오라고 했다.  L과 그녀의 어머니는 청년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청년은 휴가를 마치고 부대 복귀 후 곧바로 실시한 새벽 비상경계 작전에 투입되었다. 사방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새벽 4시경이었다. 부대를 떠나 시내로 진입하던 차량이 전복되면서 청년은 중상을 입고 대구 국군통합병원으로 후송되었다.



 같은 차량에 탄 동료 병사 두 명이 즉사하고 여러 명이 부상당한  큰 사고였다. 청년은 부모가 충격받을 것을 우려해 알리지 않았다. 다른 입원 동료들에게는 거의 매일 친인척과 지인이 찾아왔다.    


      

 청년이 편지 한 통만 보내면 L이 금방 찾아올 수 있으련만…. 그는 여러 통의 편지를 써놓고 고민을 거듭했다. L은 감수성 예민한 학생이었다. 청년은 붕대를 칭칭 감고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청년은 그때 처음으로 남몰래 눈물을 흘렸다.          



 서너 달 뒤 청년이 부대에 복귀했을 때 L의 원망 섞인 편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청년은 답장을 보낼 수 없었다. 뒤늦게 답신을 보내면 자신만 구차하고 변명을 하는 것만 같았다.



 청년은 L을 가슴에 묻기로 했다. 일년 반이 지난 2월 24일. 청년은 신성한 국방의무를 마치고 고향으로 향하는 길에 용기를 냈다.        


  

 L은 대학 입시생이 되었을 것이었다. 청년은 꽃다발을 들고 서너 시간 시장 주변을 배회했다. 먼발치서 L의 어머니를 보았다. 달려가 인사를 하고 싶었다. 하지만 많은 잡념이 청년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결국, 그는 동대구역으로 힘없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진눈깨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의 뺨에는 눈물인지 빗물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가 흘렀다.       


     


  L에게!

 이제는 중년의 원숙한 여인으로 변신해 있을 테지. 비록 나이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우리는 여러 면에서 비슷한 정서를 지니고 있었어.


 5~6년은 숫자상의 차이일 뿐 감정을 공유하는 데에는 크게 지장이 되지 않았지.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예전의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한동안 야속함과 미안함으로 방황했었지.

      

 만인의 운명은 사람의 짧은 소견으로 알 수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지. 인연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야. 수수께끼 같기도 하고…. 무지개가 빛을 잃고 사라지고 있다는 것을 빤히 보면서 어찌할 수 없다는 안타까움. 신의 예정된 계획을 인간이 감히 수정할 수 없다는 무력감.

       

 주변을 살펴보면 인연 아닌 것이 없어. 다만, 그 끈이 짧고 긴 것의 차이가 있을 뿐이지. 인연은 우연히 맺어지는 게 절대 아니야. 인연이 맺어지기 전에 이미 백천만겁의 선연(善緣)이 있었을 거야. L이 삼세(三世)를 믿는다면 다행이지만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          


 두 사람이 비슷한 시기에 태어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음은 축복이면서 동시에 탄식을 동반할 수도 있어. 사람이 보지 못하는 또 다른 세상에는 항하사보다 많은 영(靈)들이 존재하고 있지. 그 영들이 허공을 떠돌다가 쌓인 업에 의해 다양한 생명체로 환생한다고 믿거든.     

      

 겁(劫)의 세월을 영의 상태로 허공을 맴돌다 어렵게 사람의 몸으로 염부주에 태어나는 역사는 축복이야. 그런데 부부나 가족의 일원이 되었다는 것은 바로 천국이나 극락을 의미하지.


 천국은 먼 훗날 가는 곳이 아니라, 마음 먹기에 따라서는 현세가 바로 천국일 수 있거든. 그런데 어떤 사람은 먼 곳에 있다고 주장하지.

          

 현세에서도 천국을 모르는데 어찌 훗날에 그곳에 갈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우리가 많은 사연을 주고받지는 못했어도 그때 형성된 순정은 천국에서 이루어진 일이 분명해.


 나를 백년지객처럼 맞아주던 L의 부모님에게 지금에서야 고맙다는 말씀드리고 싶어. 어쩌면 두 어른께서 한두 번쯤은 내 이야기를 하셨을지도 모르겠어.


 그때마다 L은 나를 야속하게 여겼을 테고. 이제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연령이 되었잖아. 남녘으로 향하는 구름이나 새들을 보면 멍하니 서서 바라보곤 했지.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가는 현실이 지극히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억울하기도 해. 단발머리, 하얀 상의(上衣), 검정치마, 진주가 떨어질 것 같은 커다란 눈망울.


 나는 추억할 것이 있어 행복한 남자일지도 몰라. 하지만 생각 많은 남자는 슬픔도 동시에 간직해야 하는 운명이기도 해.           


 세상이 사람을 속이면서 언약은 허공에 메아리가 되었고, 장부의 중천금(重千金)도 흩어지고 말았지. 세월을 되돌릴 수 있는 장사는 없을 테니 넓은 마음으로 측은지심을 가졌으면 해.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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