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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을 바라보는 허망한 시선

by 최재효

[에세이]









손님을 바라보는 허망한 시선








세상에 손님 아닌 자가 누가 있을까?



해마다 이때쯤이면 아침 잠을 깨우는 손님이 찾아온다. 신기하게도 평일 아침이면 특유의 지저귀는 소리를 내지만 주말이나 일요일에는 조용하다. 손님이 사람과 가까이 살다 보니 서로의 생활 방식을 알고 있는 걸까? 아니면 인간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일까?



아파트 바로 앞에 거대한 굴뚝이 있는데 해마다 이맘때면 찾아와 둥지를 틀고 여름을 나는 황조롱이 부부가 그 손님이다. 두 마리가 둥지를 튼 것 같은데 수컷으로 보이는 녀석이 새벽부터 아파트 상공을 날아다니며 상쾌한 소리로 아침이 되었음을 알린다. 흉몽을 꾸었다가도 그 소리를 들으면 근심은 사라지고 평범한 일상이 시작된다.



가장 높이 나는 갈매기가 가장 멀리 본다는 리처드 바크의 소설 ‘갈매기의 꿈’에 나오는 조나단을 연상해 본다. 그러나 황조롱이는 시원한 바다가 아닌 답답한 아파트 단지에서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면서 여름을 난다. 새에게 야속한 감정이 들 때도 있었다. 간다는 인사도 없이 훌쩍 떠나면 서운한 마음에 그들의 둥지를 한동안 말없이 바라보곤 했다.



그들은 나에게 있어 해마다 찾아오는 귀한 손님이다. 새를 손님으로 맞는 나 역시 세상에 잠시 온 손님아니던가? 새들의 회귀본능을 두고 불청객으로 매도하는 분은 거의 없으리라.


有朋自遠方來(유붕자원방래)면 不亦樂乎(불역낙호)아. 벗이 먼 곳에서 찾아오면 즐겁지 아니한가?


돈으로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는 요즘 공자님 말씀도 크게 호응을 받지 못한다. 수십 년 동안 얼굴도 없던 친구가 느닷없이 찾아와 아쉬운 소리를 하는 경우가 있다. 지연, 학연, 혈연을 앞세우니 마지못해 응해주지만 헤어지고 난 뒤에는 찜찜함이 남는다.



황금 마차를 타는 친구는 어디를 가도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 그 반대는 불청객이 되기 십상이다. 손에 쥔 것이 없으니 두문불출 세상 탓을 하는 일도 있을 테고 또는 허세를 부리며 하늘을 가리는 예도 있으리라. 어느 누가 불청객이 되고 싶겠는가? 하지만 자신이 불청객인 줄도 모르는 이도 있다.



세상에 손님 아닌 사람이 어디 있으랴? 나는 어머니 자궁을 통해 세상에 나왔다. 닭이나 파충류는 알[卵]을 통해서, 매미나 잠자리는 여러 번의 환골탈태를 거쳐 비로소 세상에 나온다. 습한 데서 생겨나는 생명도 있기는 하다.



이왕 한번 왔으니 즐겁고 행복하게 주어진 천수(天壽)를 누리면 된다. 하지만 뜻과 행동이 일치되기 위해 많은 땀이 필요하다. 조물주는 생명을 창조하면서 쉽게 살다 쉽게 가면 무슨 뜻이 있을까 싶어 심술을 부린 듯하다. 즉, 평안과 행복을 추구하려면 대가를 치르도록 미리 프로그램을 짜놓은 것 같다.



둥지를 틀고 새끼를 키우는 황조롱이 모습은 우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오히려 살기 힘들다고 자식을 버리거나 부모에게 패륜을 저지르는 인간보다 훨씬 장하다. 당신은 굶더라도 자식 배는 곯게 하지 않는 우리네 어머니와 하나 다를 게 없다.



나는 잠시 와서 바람처럼 살다 어느 날 아침 해가 떠오르면 소리 없이 한 줄기 아지랑이로 피어오를 손님이다. 나를 낳아주신 아버지 어머니, 나로 인해 세상에 온 자식들, 서로가 불러온 세상 손님들이다. 많은 사람은 자신이 손님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헙접한 돌덩이나 땅덩이에 집착하며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다.



새들은 어미와 새끼가 함께 있는 시간이 길어야 서너 달이다. 우리는 부모와 자식이 한집에서 살아가는 기간은 보통 30년이다. 그것도 모자라 어떤 부모는 출가한 자식의 안위(安危)를 걱정한다. 평생 서로를 아끼는 가족은 지구상에 백의민족밖에 없으리라.



인간 세상에 패륜이 만연하니 신(神)이 저 새들을 사람들 가까이에 둥지를 틀게 한 게 아닐까 싶다. 새들이 사람의 반인륜 행위를 반면교사로 삼아 제대로 살게 하고 그 모습을 사람들이 보라고. 하지만 단지 내 주민들은 황조롱이 부부에게 별로 관심이 없다.



어떤 단지 근처에는 까마귀도 살림을 차린다. 우리는 그 새를 반포조(反哺鳥) 또는 효조(孝鳥)라고 부른다. 자기를 낳고 길러준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새끼들은 어미 새를 먹여 살린다고 해서 붙은 명칭이다. 동경(東京) 빌딩 숲 사이로 수십 수백 마리의 까마귀들이 날아다니며 특유의 울음소리를 낸다. 편견이 없다면 서울 도심에서도 반포조를 볼 수 있을 텐데….


사람이 이 땅의 주인이 아닌 이상 그 어느 생명에게도 오라 가라 할 수 있는 처지가 못 된다. 우리는 다 같은 지구의 손님으로서 다른 부류의 손님에게 무례를 저지르고 있다. 단지 그것이 무례인지 모르고 있을 뿐이다. 해마다 찾아오는 황조롱이처럼 이녁도 어떻게 하면 반가움의 대상이 될 수 있을까.


인생을 덜 산 탓으로 장시간 허공에 집 짓는 손님을 바라보지만 해답을 찾을 수 없다. 매미 울음소리가 잦아질 때쯤 조용히 떠난 손님들의 고귀한 뜻을 알 수 있을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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