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줄탁동시
“최형! 다시 한번 더 해보자고. 포핸드 스트로크는 잘하는데, 백핸드 스트로크가 좀 불안해.”
대학 시절 배웠던 테니스 기본기를 모두 잊어버리고, 뒤늦게 연수원에서 다시 기본자세부터 익히기 시작했다. 늘 마음속에는 ‘한 번 더 라켓을 잡아 봐야지’하는 간절함이 있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세월만 낭비한 뒤 다시 잡게 되었다.
감독의 불호령이 떨어질까 봐 가슴 졸이며 손에 힘을 줘 보지만 마음과 몸이 따로 행동하고 있다. 진즉에 라켓을 잡을 것이지 여태껏 무얼 했는지 자신에게 추궁해 보지만 부질없는 짓이다.
따가운 햇볕이 얼굴과 등으로 사납게 내리 꽂히고 있다. 피부가 연한 덕분에 한 시간쯤 땡볕 속에 있으면 벌겋게 달아오르고 그 후유증으로 장시간 고생해야 한다.
감독이 던져주는 공을 포핸드 스트로크와 백핸드 스트로크로 10여 분 정도 받아내고 나면 땀으로 샤워를 한 것처럼 후줄근해진다. 쉬지 않고 공을 50여 개 받아치면 세상이 빙빙 돈다. 잠시 쉬는 동안 동료들과 시원한 캔 맥주로 건배하고 나면 기분은 하늘을 날 것 같다.
지난 3월 발병해 이제 거의 완치된 구안와사의 후유증이 아직 남아서 왼쪽 눈자위가 파르르 떨린다. 자주 연습에 빠진 탓에 동료들과 복식으로 게임을 하면 자주 공을 놓치거나 백핸드 스트로크가 제대로 안 된다.
다시 테니스라켓을 잡으면서 무엇이든 배움에는 때가 있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팀을 이루어 게임에 임하면서 독불장군은 세상 살기 어렵다는 것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내가 실수를 해도 동료는 미소로 괜찮다고 위로해준다.
포핸드 스트로크와 발리(Volley) 자세는 괜찮다고 하는데, 문제는 백핸드 스트로크가 잘되지 않았다. 동료들이 쉬는 동안 슬그머니 일어나 라켓을 쥐고 자세 연습을 한다. 혼자 미친놈처럼 좌우로 뛰면서 허공을 향해 라켓을 휘둘러본다. 감독이 내가 혼자 연습하는 장면을 빤히 쳐다보며 씩 웃는다.
동료들이 게임을 하면서 심판을 보라고 한다. 남들이 경기하는 것을 보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으면서도 막상 그라운드에 서면 마음 같지 않다. ‘벌써 신체에 노화 현상이 온 것일까?’ 은근히 걱정이 되면서 세월의 무상함을 괜히 하늘 탓을 한다.
예전에는 고등학교 때 공부를 열심히 해도 웬만한 대학을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사정이 다르다. 중학교 때 배우던 집합이 초등학교 수학에 나오고 영어도 배워야 한다. 기초를 튼튼히 쌓을 때를 놓치면 결과는 처참하다.
뒤늦게 철이 들어 고등학생 때는 공부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을 맞는다. 유치원과 초등학교 때 아이 인생의 향방이 결정된다. 요즘 중. 고등학교 학생들은 1학기 기말고사로 밤을 지새운다. 전국 수십만 명의 중. 고등학교 학생의 향후 인생의 진로는 5년 내로 결정지어진다.
공부와 경쟁에 억눌린 10대들에게 문경지교와 죽마고우의 이야기는 공허하기만 하다. 그러한 고상한 고사성어는 벌써 본래 옛날이야기로 돌아갔거나 사전에만 존재한다. 아무리 친한 친구 사이라도 명문대와 보통대로 갈라지면 더 이상의 우정을 이어가기 어렵다. 사회 진출해도 가는 길이 다르기 때문이다.
나는 해마다 겨울 방학 때면 딸들을 데리고 해외를 다녀오곤 했다. 굳이 아이들에게 공부하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는다. 무언의 현장학습으로 딸들에게 때의 소중함을 일깨워 주고 싶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가면 일어로, 중국에 가면 중국어로, 영어권에 가면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내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여행을 다녀오면 그 효과가 현저하다.
백핸드 스트로크와 서브 연습으로 오른팔이 뻐근하다. 그래도 이를 악물고 연습해 보지만 역시 시간의 역행은 고되다. 상대방의 서브를 백핸드 스트로크로 멋지게 받아치면 기분이 상쾌하다 못해 희열을 느낀다. 공이 라켓을 맞고 튀어 나가는 순간 나는 공이 어떤 곳에 떨어질지 예감한다.
손맛이 좋으면 예감이 적중한다. 중간중간 무서운 속도로 넘어오는 공을 하이 발리 볼로 처리하여 체중을 실어 본다. 눈과 손과 발과 순간의 판단력으로 서브 공을 받는다.
세상만사는 몇몇 천재들이 세운 이론을 따라 변화무쌍한 모습을 보인다. 내가 젖을 먹고자 하면 젖을 찾아가면 되고, 꿀을 맛보고자 하면 꿀을 찾아 나서면 된다. 사과나무 아래서 입만 벌리고 있는 인사도 있다. 어쩌다 사과가 떨어지면 기적이라 할 것이고, 반대의 경우라면 운이 없다고 한다.
이제는 기다릴 것이 아니라 사과나무에 직접 올라가 사과를 따지 않으면 평생 사과 맛을 볼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문명의 발달은 시간의 속도를 빠르게 만들어 놓았다. 한눈을 자주 파는 사람들은 낙오자가 되어 건성으로 세상을 살 수밖에 없다.
옛날 영남지방에 사는 선비들은 과거를 보기 위하여 한양까지 가는 데 보통 한 달이 걸렸다. 한 달이라는 시간의 분량도 KTX와 비행기가 출현하면서 한 시간 내지 두 시간 거리로 단축해 놓았다. 진정한 축지법의 출현이 틀림없다.
그 당시 선비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속도이다. 공간을 이동하는 시간의 단축으로 인하여 우리의 삶이 한층 여유가 있어야 하지만 그 반대다. 사업가들은 서울과 뉴욕 그리고 런던을 하루 만에 오간다. 그들은 보통 사람과 눈높이를 맞추지 못하고 워킹홀릭에 빠진 가련한 로봇들이다. 그들에게 화목한 가정은 꿈일 뿐이다.
상대방 눈의 높이를 전혀 고려해 보지 않은 일방적 서브는 상대방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다. 냉혹한 승부의 세계에서는 가당찮은 이야기라고 몰아붙일 수 있겠지만, 게임이나 전쟁은 상대방이 있어야 한다. 상대방이 없는 게임은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독불장군이 존재할 수 없는 현대 사회에서 눈높이는 매우 중요하다.
줄탁동시란 말이 있다. *벽암록에 실린 글로 교육계에서 많이 회자하는 의미심장한 용어이다. 그 어휘의 뜻을 살펴보면 닭이 알을 품었다가 달이 차면 알 속의 병아리가 안에서 껍질을 쪼는 것을 ‘啐(줄)’이라 하고, 그 반대로 어미 닭이 그 소리를 듣고, 밖에서 마주 쪼아 껍질을 깨뜨려 주는 것을 '탁(啄)'이라고 한다.
* 벽암록 - 碧巖錄. 중국 선종의 5가 중 운문종의 제4조인 설두 중현(980~1052)이 정리하고 저술한 것에 임제종의 제11조인 원오선사가 부연하여 저술한 것을 원오의 제자들이 편집하고 간행한 것이다.
줄과 탁은 동시(同時)에 일어나야만 온전한 병아리가 되고, 건강한 닭으로 성장할 수 있다. 안팎에서 동시에 알 껍질을 깨야 비로소 병아리는 온전한 생명체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각고의 노력 끝에 어떤 결과물이 세상에 나오려는 시기를 놓치면 안 된다는 중요한 뜻도 담고 있다.
안타깝게도 요즘은 진정한 '줄탁동시'의 경우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제자와 스승의 참다운 대화가 사라지고 주입식 교육에서 결과만을 중시하는 교육풍토가 그리 만든 게 아닌가 싶다. 부모와 자식 간 흉금을 터놓는 대화가 부족한 것도 가정을 건조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고 불안전한 인격체를 만든다.
내가 테니스 코트에서 다양한 자세로 코트를 넘어오는 공을 막아 낼 수 있는 실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줄탁동시가 빈번히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근육이 많이 풀어진 탓에 마음만 앞서 나가는 현실이 아쉽기만 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