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소설의 주인공 정난주(丁蘭珠) 마리아는 1773년 경기도 양근(현, 양평) 땅 양반 정약현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의 본명은 명련(命連)이고 세례명은 마리아이다. 남편은 황사영 알렉시오로 1790년 과거에 16세의 최연소자로 합격하였다. 1791년경 황사영과 난주는 삼촌인 정약종에게서 천주교 교리를 더 깊이 배우고 입문하였다. 부부는 천주교 신앙 공동체 성장에 적극 동참하였다. 정난주는 결혼 후 십년 만인 1800년에 아들 황경한을 낳았다. 그러나 이듬해 1801년 정조 임금이 죽고 정순왕후와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으면서 신유박해가 일어나 친정은 멸문지화되고 남편은 능지처사 되었다. 그녀는 추운 겨울에 젖먹이 아들을 안고 제주도로 귀양을 간다.
본 소설을 하늘에 계신 정난주 마리아님께 바칩니다. - 저자 최재효
귀양 가는 모자
끝내 경한이를 만나보지 못하고 이승을 하직하게 되는구나. 어미와 자식이 작은 바다를 가운데 두고 만나지도 못하다니…….
동장군의 기세가 사라지고 영등 할망의 심술도 어느 정도 잦아들 무렵에 서울 할머니 정난주 마리아는 서른 일곱해 고단한 노비 생활 끝에 하늘의 부름을 받고 말았다. 그미가 반평생 넘게 노비 생활을 했던 주인 김씨 가문 사람들은 스스로 상주가 되었다. 주인집에서는 조쌀한 그미를 가족으로 생각하고 최고의 예우로써 제주 대정현 모슬포 뒷산에 성대하게 장례를 지냈다.
그미가 마지막 숨을 내쉴 때까지 애타게 기다리던 아들 황경한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상주들 역시 그가 나타나기를 기대하였으나, 그미의 관이 묻히고 봉분이 마무리 될 때까지도 아들 황경한의 모습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그미 나이 예순 여섯이었다.
* 그미 - 주로 소설 같은 문학 작품에서 '그녀'를 멋스럽게 부르기 위한 말.
[ 조선의 체제를 부정하고 외세를 끌어들이려 했던 대역죄인 황사영(黃嗣永)을 능지처사에 처하고, 그의 처 정명련과 두 살배기 아들을 원악도인 제주 대정현에 부처하라.]
어린 왕을 대신하여 수렴청정하는 대왕대비 김 씨의 명령은 비수보다 날카로웠다. 그녀의 명에 감히 토를 다는 중신은 아무도 없었다. 대비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우두망찰 중신들은 이마를 바닥에 처박고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신유사옥이 일어났다. 이를 두고 다른 사람들은 신유박해라고 했다. 이 불행한 사건의 발단은 영조의 아들로 뒤주 안에서 사망한 사도세자였다. 영조의 계비인 대왕대비 김 씨의 친족들과 노론들은 친소론 성향의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저궁(儲宮)에 있을 때부터 세자 이훤(李暄)은 노론과 외척세력들에게 각을 세우며 보이지 않는 기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조정의 실권을 쥐고 있던 노론은 나이 많은 임금이 갑자기 훙서(薨逝)하는 날이면 수백 년간 유지되던 권력을 송두리째 잃을 판이었다. 마구발방으로 행동하는 그들은 당리당략을 위해서는 왕자 하나쯤 희생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조선은 임금이 아닌 사대부들이 움직이는 성리학의 나라였다. 숫백성들은 그들을 떠받치기 위해 존재하는 부류에 지나지 않았다.
늙은 임금이 승하(昇遐)하자 삿된 노론들과 구지레한 외척세력들은 끝까지 세손이 보위에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사도세자의 아들 이산(李祘)이 천신만고 끝에 보위에 올랐다. 새 임금과 조정에서는 선대왕을 영종[英宗 - 훗날 영조(英祖)로 개칭됨]이란 시호를 내렸다.
새 임금은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음에 이르게 한 대왕대비 김 씨와 그의 일족들 그리고 노론 계열의 중신들을 대거 숙청하였다. 젊은 임금의 마음이 풀어질 때까지 착살맞은 대왕대비 김씨는 손자의 시선에서 사라져 구중궁궐 깊은 곳에서 숨을 죽이며, 고단한 세월을 죽은듯 지내야 했다.
보위에 오른 지 24년 만에 젊은 임금 이산이 원인을 알 수 없는 병으로 훙서하였다. 그의 죽음을 두고 조정 안팎은 물론 저잣거리에서조차 임금이 노론들에 의해 독살당했다는 소문이 끊이지 않았다. 개혁 군주였던 이산의 죽음으로 조선은 또다시 권력투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었다.
조정에서는 급서한 왕에게 정조(正祖)란 시호를 수여하였다. 그의 뒤를 이어 정조의 어리보기 아들이 보위에 오르자 대왕대비 김씨가 수렴청정을 하며, 정권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조정의 중신들은 가리산 지리산 하며 그녀의 눈치 보기에 급급했다. 그녀의 눈꼴틀린 행동에도 중신들은 누구 한 사람 나서서 밀막거나 간언하지 못했다.
모지락스러운 그녀에게 지난 24년간의 설움을 풀 기회가 온 것이다. 그녀는 거드럭거리며 자신을 핍박한 남인 계열의 중신들을 하나씩 제거하였다. 지지부진한 반대 세력들에 대한 숙청에 염증을 느낀 대비는 일거에 친정조 세력을 쓸어버릴 수 있는 방도를 찾기에 골몰하였다.
정조 임금 당시에는 천주교를 서학(西學)이라 하였으며, 유학을 거부하고 어머니의 신주(神主)를 불살라 버린 충청도 금산 사람 윤지충(尹持忠)을 처형한 이외에는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는 그리 심하지 않았다. 임진란 이후 외국의 문물이 대량으로 수입되었고, 이때 전래한 천주교는 이승훈(李承薰)이 베이징에서 영세를 받고 귀국하면서 전국에 급속히 확산하였다.
정조 임금에 의해 친가가 멸문지화의 불운을 겪은 대왕대비 김 씨의 원한은 엉뚱하게도 천주교도들의 악랄한 핍박으로 이어졌다. 그녀는 천주교도들은 성리학을 거부하고 평등사상을 부르짖으며, 조선의 통치이념인 성리학을 부정한다고 판단하였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 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금수(禽獸)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다.]
그녀는 재바르게 천주교를 사학(邪學)으로 단정하고 전국에 대대적인 단속령을 내렸다. 천주교도들 중에는 친정조의 세력이었던 정약용, 정약전, 이승훈, 이가환, 황사영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또한, 그녀는 천주교를 금지하는 교지를 내리면서 오가작통법을 시행하여 백성들끼리 서로 감시하고 조금이라도 이상한 일이 있으면 관아에 고발하게 하였다. 만약 한 집에서 천주교 신도가 적발되면 다섯 가구 모두 처벌하도록 하는 악법 중의 악법이었다. 신유년 박해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조정에 의해 천주교도들이 박해를 받자 황사영은 충청도 제천 봉양면 구학리에 소재한 배론에 숨어들어 그 유명한 황사영백서(黃嗣永帛書)를 제작하였다. 백서는 흰 비단에 주문모 신부의 활약상과 조선의 천주교 신도들이 박해받고 있는 상황 등을 적어 청국으로 떠나는 동지사(冬至使) 일행을 통해 베이징에 머물고 있는 구베아주교에게 보내려 한 장문의 서한이었다.
그러나 백서가 유출되기 전에 발각되면서 황사영은 반역자로 능지처사되었고, 천주교도들에 대한 조정의 탄압이 더욱 가혹해졌다. 조정은 천주교 탄압이 정당하였다고 주장하며, 토역반교문을 반포하였다. 이때 희생된 사람이 대략 오백 명이 넘었다.
신유박해는 급격히 확대된 천주학 교세에 위협을 느낀 지배세력의 종교탄압이었다. 이를 구실로 노론(老論) 등 집권 보수 세력이 당시 정치적 반대 세력인 남인을 비롯한 진보적 사상가와 정치세력을 탄압한 권력다툼의 일환이기도 했다. 신유박해 이후 살아남은 신자들은 수도와 박해지를 피해 강원도와 경상도 깊은 산간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새로운 신앙공동체를 형성해 나갔다.
황사영 알렉시오는 남인 계열의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는 16세 때 과거 진사시에 합격할 만큼 영민하였고, 주문모 신부에게 영세를 받고 세속적 명리(明利)를 버리게 되었다. 그리고 나주 정씨인 약현의 딸 난주(명련)과 혼인하였다.
그미 역시 독실한 천주교 신자로 세례명은 마리아라고 하였다. 그미의 가문을 보면 당시 최고의 실학자로 불리는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 형제가 그미의 숙부들이었다. 그미는 혼인한 지 10년 만에 학수고대하던 아들 경한(景漢)을 얻었다.
그러나 나라에 반역한 죄로 처형된 지아비의 죄에 연좌되어 그미는 두 살배기 아들을 품에 안고 원도(遠島)인 제주 대정현으로 귀양살이를 떠나야 했다. 겨울 초입에서 떠난 귀양 길은 살아서 돌아오지 못할 죽음의 길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속-
* 오탈자 등은 최종 탈고시 수정 보안할 예정입니다. 깊은 이해 있으시길 빕니다.
본 글은 오로지 소설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