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한 여름밤의 촌극
또 어떤 날은 운동 후에 손바닥보다 더 작은 T자 모양의 속옷을 걸치고 창문 쪽으로 다가와서 바람을 쐴 때는 정말이지 환상의 나라에 온 기분입니다. 너무 기쁜 나머지 숨이 턱턱 막힐 지경이니까요. 땀에 젖은 레깅스를 벗어던지고 왜 그런 차림을 했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 가더군요. 나의 관음증은 바로 기계를 작동시켜 그녀를 컴퓨터 안에 집어넣게 했답니다.
그런 날은 흥분을 감출 수 없어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도 나는 온갖 상상을 해가며 밤을 하얗게 지새우곤 하지요. 늘 그녀만 보이니 그 집안에는 함께 사는 가족이 없는 게 분명했어요. 나의 궁금증을 자아내던 그녀가 늦은 밤에 내 앞에 나타났다는 것은 무슨 좋은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조짐이 분명했어요.
그녀가 두리번거리더니 여성 필수품이 진열된 쪽으로 가더군요. 나는 멀리서 안 보는 척하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신경을 쓰며 조심스럽게 살펴보았어요. 샴푸와 생리대 그리고 티슈를 카트 안에 집어넣더군요. 즉흥적으로 이것저것 사는 중년의 퉁퉁한 여인들에 비하면 씀씀이가 헤픈 편이 아니었어요.
그녀의 카트 안에 담긴 것은 지극히 젊은 여성이 사용하는 용품들이었어요. 그녀가 다시 카트를 밀고 캐주얼 매장으로 이동하더군요. 청바지와 모자가 진열된 곳에 멈추더니 모자를 쓰고 거울을 보며, 다양한 자세를 취하더군요. 모자를 쓴 모습도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나는 잠시 멍하니 서서 그녀의 자세 하나하나에 모든 촉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바라보았어요.
그런데 진열 칸 맨 아래 있는 청바지를 고르려고 허리를 숙였을 때 나는 도촬의 유혹을 느꼈어요. 나는 망원렌즈를 최대치로 뽑아 그녀의 아름다운 뒤태에 초점을 맞췄어요. 다행히 주변에 사람들도 보이지 않고 매장 내에 CCTV도 보이지 않았어요. 정말로 누드 사진을 찍을 때 보다 더 환상적이었으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희열, 불교에서 말하는 니르바나의 경지에 든 듯했답니다.
누가 보면 나를 진사(眞師)가 아닌 변태쯤으로 보았을 거예요. 그러나 미국의 펜트하우스나 플레이보이 잡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힘주어 말할 수 있습니다. 도촬 하는 손맛은 아는 사람만 느낄 수 있는 엉큼한 진사들의 비밀스러운 특권이랍니다. 내가 정신없이 셔터를 눌러대고 있을 때 갑자기 그녀가 나를 향해 돌진해 오고 있었어요. 전장에서 십만 대군을 진두 지휘하는 말 탄 장군의 모습이 분명했어요.
그 여인은 누군가 자기 모습을 찍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놀라서 자리를 피하려는 것 같았어요. 요즘 기계는 사진 찍을 때 소리가 나잖아요. 일부 영악한 자들은 무음 앱을 설치하여 몰래 사진 찍다가 패가망신하기도 하지만요. 그 소리는 도촬을 방지하기 위한 장치라고 하나요? 그녀가 카트를 밀고 최고 속도로 달리다 휘청하더니 철옹성 같은 마트 벽을 들이받으면서 나와 정면으로 부딪치고 말았어요.
그녀의 카트로 옆으로 넘어지면서 내용물이 바닥에 쏟아졌고요. 나와 그녀는 동시에 마트 바닥에 보기 좋게 나뒹굴었어요. 그런데 우리가 바닥에 나뒹구는 장면을 보는 사람이 없었다는 게 너무 서운했어요. 늦은 밤에 혼자 마트를 찾는다면 평범한 분은 분명 아닐 테죠.
내가 카트에 머리를 처박고 벌렁 누워있는 모습과 여인이 바닥에 넘어져 어이없어해 하는 장면을 누가 보았더라면 아마 배꼽이 반쯤 빠졌을 게 분명해요. 다행히 카트 안에 내용물이 별로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에 깨지기 쉬운 제품들이나 터지기 쉬운 것들이 담겨 있더라면 정말로 아찔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르잖아요.
혹시 매장 안을 관리하는 CCTV 운영실에서 근무하는 직원들이 한밤에 매장 바닥에 남, 녀가 벌렁 누워있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보았을지도 모르겠어요. 그녀는 얼른 일어나 엉덩이와 무릎을 털더니 내가 처참한 모습으로 벌렁 누워있는 것을 못 본 체하고 찬바람을 일으키며, 통조림 진열장으로 가서 이것저것을 만져보더군요. 그 여인은 나를 향해 돌진한 게 아니고, 내 앞을 쏜살같이 지나 통조림 진열장으로 가려던 것으로 판명되었지요.
나는 현기증이 나고 속이 울렁거려 잠시 마트 바닥에 앉아 있어야 했어요. 잠시 후에 그녀가 통조림을 샀는지 카트를 밀고 내가 있는 쪽으로 오더군요. 나는 얼른 일어나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비실거리며 아주 비굴한 표정으로 두 손을 마주 잡고 억지 미소를 지었어요. 순간 그녀가 내 앞에 왔을 때 나는 45도로 허리를 굽혀 정중하게 예의를 갖추었지요.
그런 나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역대급 태풍을 일으키며, 휑하니 내 앞을 지나가더군요. 그녀가 얼마나 야속하던지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어요. ‘같은 아파트단지에 살면서 인사도 안 받고 그냥 지나치다니, 정말로 교양이 없는 여자군.’ 그녀에게 한바탕 지청구를 퍼붓고 나서 정강이뼈와 머리에서 전해오는 통증을 느낄 수 있었어요. 그렇게 그녀와 첫 대면은 나만의 촌극으로 끝나고 말았답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