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루를 보다
[중편소설]
신기루를 보다
그런데 집에 와서 그녀의 뒤태를 찍은 사진을 보려고 카메라 액정모니터로 조작하려다 나는 비명을 지르고 말았답니다. 왜냐고요? 친구 녀석이 돈도 안 받고 장기로 대여해 준 카메라 액정모니터가 깨져서 화상을 볼 수 없었거든요. 참으로 암담했어요. 다음 날 나는 친구 녀석에게 약간의 수리비를 건네주고 다른 카메라를 빌려야 했답니다. C사에서 제조한 28~300mm 고가의 렌즈가 손상되지 않았기에 천만다행이었어요.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괜히 그녀에게 적개심을 품게 되면서 어떻게 하면 그녀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가서 내 기계에 그녀의 선명한 이미지를 담을 수 있을까 궁리했어요. 정확한 표현을 빌린다면 그녀의 아름다운 S라인을 전후좌우에서 마음 놓고 촬영할 수 있을까 고민하다가 밤이 아닌 아침 시간대에 그녀를 관찰하기로 마음먹었답니다.
보통 아침 11시쯤 일어나 아침 겸 점심을 챙겨 먹는 나에게 새벽 5시에 일어나기란 죽기보다 힘든 일이었답니다. 게으름 피우는 일도 역시 부지런해야 하거든요. 부지런하지 못하면 세상에 되는 일이 없어요. 그녀가 혹시 새벽 운동이라도 나갈지 모른다는 일말의 기대 때문이지요.
그런데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내가 차가운 이슬을 맞으며, 근무하는 직원도 없는 아파트 관리소 앞에서 서성거리던 셋째 날 새벽, 거짓말처럼 그녀가 내 시야에 포착된 거예요. 아무리 눈을 비비고 또 비벼도 그녀가 틀림없었답니다. 빨간색 운동복을 입고 이마에 태극 마크가 선명한 머리띠를 두른 그녀의 모습은 너무 앙증맞아 보였답니다.
우리나라 축구 대표팀인 태극전사들이 다른 나라 선수들과 경기를 펼칠 때 서울광장이나 또는 상암 축구 경기장에 벌떼처럼 몰려들어 동시다발로 ‘대~한민국’을 외쳐대는 귀여운 붉은 악마의 모습이었어요. 브레이크가 고장 난 내 심장의 바퀴들이 마구 달리기 시작했어요.
이때만큼은 내 손에 아무것도 없었답니다. 생각해 보세요. 젊은 놈이 새벽에 시커먼 카메라를 들고 아파트를 기웃거린다면 누구나 그를 이상하게 볼 거 아니겠어요? 그녀의 이마가 물기로 번지르르한 것으로 보아 그녀는 아침 조깅을 즐기는 게 틀림없는 것 같았어요. 한때 천여 가구가 살던 재개발 지역 아파트단지에 이른 아침에 사람의 그림자는 거의 찾아볼 수 없고 주인이 고의로 유기한 고양이나 개들만 어슬렁거리며 활보하고 있었답니다.
나는 얼른 폐허가 되다시피 한 아파트 안으로 몸을 숨겼어요. 왜냐하면 유령의 마을로 변한 아파트단지에 이른 아침 웬 남자가 불쑥 나타난다면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그녀가 점점 나 있는 곳으로 가까이 다가왔을 때 나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분명히 그 여인은 며칠 전 늦은 밤 M 마트에서 본 여인이 틀림없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녀가 콧노래를 부르며 내 앞을 지나갈 때 나는 화장기 없는 그녀의 얼굴을 자세히 볼 수 있었답니다. 그리고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 동안 그 자리에 서 있어야 했어요. 그런데 어쩌면, 어쩌면 그럴 수 있는 걸까요? 나는 속은 느낌, 아니 중국 단둥에서 걸려 온 보이스 피싱 조직원의 전화에 속아 수 천만 원을 날린 기분이었답니다.
밤마다 내 비싼 렌즈에 들어와 나를 환상의 세계로 이끌던 그 주인공은 젊고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던 눈부신 미모의 여인이었는데, 방금 유령처럼 내 앞을 지나간 여인은 나이가 50대 중후반처럼 보였으니까요. 나는 집에 돌아와서 한꺼번에 우황청심환 세 알을 복용하고도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데 많은 시간을 허비해야 했어요. 어쩌면 그럴 수가 있을까요. 분한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억울하고 답답한 심정에 연약한 가슴을 사정없이 두들기기도 했으니까요.
나는 종일 침통한 심정으로 누워 애꿎은 담배만 축내며 쓴 소주 서너 병을 비우고 말았답니다. 혼자 사는 남자에게 변변한 안주가 어디 있겠어요? 라면 국물이면 그만이지요. 나는 허기진 뱃속을 퉁퉁 불어 터진 라면으로 채우고 한잠 자고 일어나 노트북을 부팅했어요.
아무래도 내가 여우에게 홀린 기분이 들었거든요. JPG 파일로 내 노트북에 저장된 사진 속의 그녀는 분명 30초 중반의 탄탄한 몸매를 자랑하는, 지적이며 아름다운 여인이 분명했어요. 지금까지 내가 봐 온 여인 중에 최고의 여인이라고 나 스스로 자부하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환상이 순식간에, 아니 송두리째 허공으로 사라지려고 하는 찰나에 이유를 알 수 없는 슬픔이 내 오감을 지배하기 시작했어요.
참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당장 그녀가 사는 아파트로 달려가 내 두 눈으로 그녀의 실체를 확인하고 싶었어요. 그러나 아무런 관계도 없는 내가 그녀 아파트 초인종을 누른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잖아요. 내가 동료들은 모두 해고 살아 겨우 남은 늙은 경비원 정도라면 정당한 명분을 만들어 그녀의 아파트 현관문을 당당하게 노크할 수 있지만, 나는 아무런 볼 일도 없이 무작정 그녀의 집 문을 두드릴 수는 없거든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