착각의 바다에 빠지다
[중편소설]
착각의 바다에 빠지다
조리개 우선 모드에 설정해도 아마추어의 실력을 어쩔 수 없었어요. 다시 셔터속도 우선과 조리개 우선 모드로 돌려봅니다. 결과에 실망한 나머지 풍부한 경험과 감각으로 조절하여 사진을 촬영할 수 있는 M 모드에 기계를 설정해도 실력 부족을 절감할 뿐이었어요. 항상 2% 모자라는 뭔가가 나의 목구멍을 타들어 가게 했습니다. 그런데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정신적 희열을 느껴본 사건이 있었답니다.
열대야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여름이었어요. 대개가 여름에는 남녀노소 할 거 없이 간편하게 입고 다니잖아요. 나는 도깨비들이 살법한 곳에서 혼자 사는 관계로 보통 보름에 한 번 마트에 가거든요. 참고로 나는 늘 시커먼 DSLR이나 똑딱이 디카를 애견처럼 데리고 다닌답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은 내가 대단한 사진작가인 줄 알아요.
그날은 밤 10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어요. 내가 M 마트에서 카트를 밀고 다니며, 잡화와 일용할 양식을 고르고 있는데 어디서 많이 본 듯한 묘령의 여인이 혼자서 카트를 밀고 다니더군요. 나는 여우에 홀린 사람처럼 그녀와 일정한 거리, 그러니까 그녀가 누가 자신을 미행한다고 느끼지 못할 만큼의 간격을 유지하며 뒤를 따랐어요.
그녀는 그날 꼭 끼는 흰색 계통의 반바지에 상의는 붉은색 티셔츠 차림이었어요. 정말로 섹시함 그 자체였지요. 그녀의 자태는 몰래 훔쳐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과 함께 희열과 황홀감을 맛보게 했습니다. 난 너무나 감사한 나머지 내가 무엇을 사야 할지를 까맣게 잊고 그녀를 미행하기 바빴어요. 그녀의 뒤태는 어린 사내아이부터 미수(米壽)가 훨씬 지난 사내까지 시선을 고정하게 할 정도였으니까요.
비록 백색의 전등 불빛 아래긴 했지만 멀리서도 금방 눈에 들어오는 튀는 차림이었지요. 그녀의 걸음걸이와 머리 모양을 보며, 나는 가만히 그녀의 행적을 더듬어 봤어요. 어디서 많이 보던 여인이 분명했거든요. 나는 머리를 쥐어박으며 내 뇌리에 입력된 이미지를 끌어내는데 5분 정도가 소요되었어요. 맞아요. 그녀는 내가 사는 아파트 건너편 동(棟)에 사는 입주민이었어요. 나 같은 도깨비나 유령을 이웃으로 둔 여인이란 말이죠.
나이는 서른 중반쯤 되어 보이고 얼굴은 미스코리아 진선미에 뽑힐 정도는 아니지만, 우정상이나 포토제닉 또는 기타 협찬사에 주는 허접한 상(賞)은 충분히 받을 수 있는 미모를 지니고 있었답니다. 뱃살도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노처녀나 아니면 출산을 전혀 해본 경험이 없는 미시가 분명해 보였어요.
내가 그녀를 금방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은 그녀가 밤이면 거실에 있는 러닝머신 위에서 뜨거운 땀방울을 뽑아내는 장면을 자주 볼 수 있었거든요. 밝은 불빛 아래서 가까이 보는 것하고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망원렌즈를 통해 살피는 것 하고는 상당한 차이가 있기는 해요. 약간의 시각의 혼란이 있긴 했지만 나는 그녀를 금방 알아봤어요.
정확히 밤 8시면 그녀의 거실에 조명이 들어오고 잠시 후 그녀는 하체에 찰싹 달라붙은 레깅스 차림으로 러닝머신을 돌린답니다. 그녀가 알면 기절할 일이지만 내 컴퓨터에 그녀의 땀 흘리는 장면 수백 장이 저장되어 있거든요. 그녀가 대충 한 시간 정도 기계를 못살게 굴면 이마에 땀방울이 송알송알 맺히지요. 땀에 촉촉이 젖은 그녀의 모습은 아침 이슬을 머금은 백합 같았어요.
그때가 기회랍니다. 그녀가 기계에 달린 계기판을 들여다보며 자신이 한 시간 동안 달린 거리를 나름대로 가늠해 보며, 멍청하게 서 있을 때 나의 5백 mm 망원렌즈가 진가를 발휘한답니다. 다시 한번 말씀드리지만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새치름한 모습은 금강산 비로봉 아래 맑고 투명한 연못에서 금방 목욕을 마친 선녀 같거든요.
나의 기계는 순식간에 그녀에게 초점을 맞추고 매초 여러 장의 사진을 경쾌한 소리와 함께 모사해 낸답니다. 그녀는 곧 철거할 아파트라 거실에 에어컨을 설치하지 않은 듯합니다. 운동을 마치면 창문을 활짝 열어놓는 바람에 나는 자주 즐거운 비명을 지른답니다. 그녀의 용맹성에 대해서는 밤에도 시커먼 선글라스를 쓰고 다니는 해병대 출신 아저씨들도 혀를 내두를 겁니다.
내가 사는 아파트는 대부분 노인이거나 아니면 보상받고 나간 집들이라 밤낮으로 음침할 정도로 어둡거든요. 나는 후천적으로 야행성으로 돌연변이되어 집에서는 TV 이외에는 거의 전등을 켜지 않는답니다. 단지의 그런 음험한 분위기가 그녀를 용감하게 만들었나 봅니다. 주변에 신경 쓸 시선이 없다고 판단했을 테니까요.
어떤 날은 운동을 마치고 과감하게도 상의를 훌렁 벗어던지곤 한답니다. 브래지어도 착용하지 않은 그녀의 풍만한 육덕은 모유 수유로 자식을 키운 어머니들의 그것보다 더 대단해 보였어요. 내가 일부러 그녀의 육신을 훔쳐본 것이 아닙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그녀가 보여준 것이지요. 그러니 나에게 변태니, 관음증 환자니 하는 쓸데없는 소리는 합당하지 않겠지요.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 자신을 은밀한 시선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을 즐기는 것 같았어요. 괴리가 좀 있는 인용이지만 경제학에서 말하는 공급과 수요가 맞는다고 할까? 뭐 그런 머리 아픈 거 있잖아요. 아니면 나이를 더 먹기 전에 자신의 싱싱하고 단단한 육신의 아름다움을 드러내 놓고 타인에게 보여주고 싶어 안달이 난 여인이랄까? 하여튼 좀 아리송하면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묘한 인물이었어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