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투명인간이 되다
나는 투명인간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다 이런 절차를 밟고 있는지 나도 잘 모르겠습니다. 세상에는 눈이 열개 달린 사람도 있고, 천수천안을 지니고 세상 모든 고통을 듣고 해결해 주는 관음보살같이 오지랖이 넓어 하루 24시간도 부족한 분도 있답니다. 나는 조상님, 아니 정확히 말해서 현존해 계시는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육신에 남들처럼 있을 거 다 있는 지극히 보편타당한 사람입니다.
거울을 보면 그리 잘생긴 편도, 못생긴 편도 아닌 어정쩡한 남자랍니다. 그럴듯한 대학교를 나와서 10년 동안 이런저런 회사를 두루 섭렵하다 보니 세상살이에 짜증이 나더군요.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에 나는 인내하며, 하루빨리 강산이 변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개성 없는 얼굴 탓인지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은 듯 나에게 책상과 컴퓨터를 주고 한 달에 한 번 정확하게 월급을 지급했습니다. 그런데 뭐 별로 하는 일 없이 회삿돈을 축내는 거 같아서 미안하고 부담스러워 일 년에 한 번씩 회사를 바꾸며, 이런저런 경험을 통하여 사회 물정을 어느 정도 알았다고 자부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직장도 일 년이 넘으면 싫증이 나더군요. 그래서 잘 나가던 회사도 집어치우고 그동안 모아놓았던 돈으로 일 년 정도는 그럭저럭 잘 먹고살았습니다. 그런데 일 년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노는 일도 정말 지루하더군요. 내일모레면 불혹인데 아직도 적당한 배필을 만나지 못해 부모·형제와 주변 친구들로부터 온갖 구박과 험담을 들어가며 구차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는 외모는 순박한 편이나 몸속에 수백 마리 *마구니와 온갖 잡귀들로 가득한 것 같기도 합니다. 삐딱한 시선으로 보면 망종의 극치를 달리는 음종 하고 도저하면서 어찌 보면 세상을 달관해 보이기도 할 겁니다.
또는 나와 취향이 비슷한 시선 나를 관찰한다면 돈오하여 마치 옛날 중국의 죽림칠현을 답습하려는 별난 인류 같기도 할 겁니다. 제가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연구해 보아도 확실하게 제 자신의 출처를 알 수 없답니다.
* 마구니 - 魔仇尼[Maguni]. 불교 용어 중 하나로, 마(魔)라 또는 마군(魔軍), 마왕(魔王)이라고도 한다. 어떤 형상을 가지고 있는 귀신이나 도깨비가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온갖 번뇌를 의미한다.
어머니의 강력한 권고에도 불구하고 백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혼자 방을 얻어 살고 있으니 참으로 마음은 편합니다만, 나날이 늘어가는 주름살과 뱃살로 고민이 이만저만 아니랍니다. 부모님이 살고 계신 집에서 백 미터 내에 웅숭그리고 살 수 있는 집을 공간을 마련하니 매일 같이 어머님이 잦아오시는 사품에 보통 불편한 게 아니었습니다.
부모님 사시는 곳에서 20킬로 떨어진 재개발지역이라고 지정 고시된 지역에 월셋집을 얻었습니다. 재개발이라는 딱지가 붙으니까 세입자가 원하는 값으로 얼마든지 입주하여 살 수 있답니다.
내가 겨우 마련한 보금자리는 산 중턱에 있는데 지은 지 40년 가까이 되는 우묵한 5층짜리 아파트랍니다. 재개발지역이라 밤이면 단지 내에 사람보다 도깨비나 귀신들이 돌아다닐 것 같은 음산한 분위기랍니다.
재개발지역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을 보니 저처럼 주머니 사정이 좋지 않거나 아니면 무슨 보상을 노리고 들어와 사는 억실억실하며, 흐리마리해 보이는 사람사람들이 대부분인 듯합니다. 개중에는 본처의 날카로운 시선을 피해 하해와 같은 음욕을 해소하기 위해 애인에게 임시 거처를 얻어주는 경우도 있다고 합니다.
온종일 입에 담배를 물고 인터넷이나 주물러대고 있자니 입에서 단내가 나고 나 자신이 외국 오페라에 등장하는 유령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하루 두세 번 화장실 다녀오고 두 끼의 밥으로 허기를 때우며 한 달 정도 누워만 있으면 꼭 그렇게 변할 것 같습니다. 풍신은 부모님이 그런대로 멀쩡하게 물려주셨지만 하는 일이 유령 같은 짓만 하니 한심한 생각이 든답니다.
취미를 하나 가져야겠다고 마음먹게 되었지요. 요즘 들어 나는 카메라에 거의 미쳐가는 중이랍니다. 집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누워있거나 면벽 삼매경에 들어 있자니 내가 수도승이 된 것인지 아니면 감옥 아닌 감옥에 들어앉아 있는 것인지 분간이 안 갈 때가 많았습니다. 이러다 지독한 귀차니스트가 될까 걱정이 되기도 해요.
얼마 전에 너무 심심하고 무료해 남대문 중고 카메라점에서 일하는 대학 동창 녀석을 몇 번 찾아가 말동무가 되어 주었지요. 그 녀석이 나에게 한번 써보라고 시커먼 카메라를 건네더군요. 아주 주는 게 아니고 빌려주는 거라고 하면서 내가 혹시 그 시커먼 물건을 맡기고 술이라고 마실까, 은근히 걱정하는 눈치였어요.
비록 중고 물건이긴 했지만, 그 물건은 전문가들이 주로 사용하는 기종이라 하더군요. 다양한 용도의 줌렌즈까지 얻어와 이리저리 작동시켰지만, 나는 워낙 기계치라 그 시커먼 놈과 친해지는 데 꽤 시간이 걸렸습니다. 기계와 소통이 되니 하루 일상이 무료하지는 않았습니다.
나는 카메라에 문외한이라 닥치는 대로 셔터를 눌러댔습니다. 왕초보들이 용감하잖아요. 생각보다 사진이 너무 잘 찍히더라고요. 친구 녀석 말에 의하면 카메라 바디와 렌즈는 프로급 진사님들이 쓰는 것이라고 하네요. 졸지에 나는 진사가 되어 외출할 때 육중한 기계를 메고 다녔습니다.
나는 아마추어도 아니고 중간도 아니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얼치기 진사가 된 셈이죠. 카메라 사용 설명서를 두세 번 읽어 보아도 도대체 무슨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린지 알아들을 수 없더라고요. 처음에는 폼이나 잡으려고 공원이나 고궁에 카메라를 둘러메고 다니며, 마구잡이로 찍어댔지요.
내 카메라 보다 성능이 떨어지는 카메라를 지닌 진사가 보이면 슬며시 다가가 눈치를 살피죠. 그 진사가 순진 하거나 어설퍼 보이면 마치 사진에 고수인 것처럼 은근히 간섭하며 기를 죽이곤 했지요.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