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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여자(6)

귀신의 조화?

by 최재효


[중편소설]










귀신의 조화?





나는 카메라점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자 친구 녀석은 박장대소를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면서 여자는 믿을 상대가 못 돼. 그러니 지금이라도 정신 차리고 현실을 똑바로 보라고 점잖게 타이르는 게 아니겠어요. 난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서 친구 녀석에게도 적개심을 품게 되었어요.


그 녀석은 결혼해서 아이가 둘이나 있는 가장이거든요. 너무나 창피한 나머지 쥐구멍을 찾았어요. 방안에 아무리 찾아도 구멍이 없더군요. 나는 녀석이 나를 충분히 이해해 주는, 세상에 둘도 없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친구가 아니라 원수였어요. 어느덧 날이 저물고 또 야속한 밤이 찾아왔네요.



나는 쓰린 속을 자장면으로 어르고 마시다 남은 소주를 한꺼번에 부어 뱃속을 혼란스럽게 했어요. 소주 서너 잔으로 충격에 빠진 내 심성을 달래기에는 너무 부족하다 싶어 내가 우리나라 국보 제1호처럼 아끼고 아끼던 브랜디인 헤네시 XO의 병마개를 땄답니다. 40도가 넘는 술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자 속에서 금방 불이 일어났어요. 난리가 난 거죠.



나는 안 되겠다 싶어 하이볼 글라스에 얼음을 가득 채우고 콜라와 브렌딩 해서 마셨어요. 홀짝거리며 마시다 보니 금방 아까운 양주 반을 마시고 말았어요. 혈관에 높은 도수의 알코올이 공급되면서 나는 차차 안정을 되찾기 시작했어요. 파바로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거실에 꽉 차면서 대학 시절 한 때 죽자 살자 사랑했던 미정이가 생각나기도 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 내 첫사랑이었던 인선이가 자꾸만 눈앞에서 어른거리며 시야를 흐리게 했어요.



거실 창문을 활짝 열어젖히자 상쾌하고 시원한 바람과 실연당한 것으로 추정되는 매미들의 구슬픈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들더군요. 거기에 보름달은 왜 그리 밝던지. 바다 같은 고독, 세레나데 같은 달빛, 달콤한 술, 가슴을 붕 뜨게 하는 음악, 간간이 들려오는 매미들의 슬픈 합창, 조용하고 은은한 거실 조명 갑자기 감상적인 분위기에 나는 빠져 들었어요. 그런데 뭔가 한 가지 빠져 허전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어요.



나는 그게 뭔가 하고 생각해 보았지만 금방 생각나지 않더군요. 파바로티에 이어 베르디의 오페라 춘희(春姬) 중 ‘축배의 노래’가 코쟁이 여성들 사이에 바람둥이의 대표로 인식되는 플라시도 도밍고의 솜사탕 같은 목소리를 타고 흘렀어요.




거실과 내 가슴에 외로움이 넘실 댈 때 나는 그 이유를 알 수 있었어요. 해어화! 당나라 현종이 애첩 양귀비를 두고 ‘사람의 말귀를 알아듣는 꽃’이라고 극찬한 꽃이 없었던 거예요. 나는 순간 오늘 아침의 참담했던 상황을 떠올렸어요.



세월이 야속한 것이지, 그녀가 미운 게 아니잖아요. 시계를 보니 오후 8시가 다 되었네요. 나는 오랜 습관처럼 창문 쪽으로 다가갔지요. 역시 그녀는 시계보다 정확했어요. 타이트한 차림으로 러닝머신을 괴롭히고 있었어요. 나는 속으로 외쳤어요.



다 늙은 주제에 운동은 해서 뭘 해? 봐줄 사람도 없을 텐데. 쓸데없이 나를 혼란에 빠트리게 하다니 염병! 순진한 사람을 놀렸으니 당신은 천벌을 받을 거야. 그렇게 몇 번을 큰 소리로 외치며, 그녀에 대한 적개심을 발산하자 속이 다 시원하지 뭐예요.



나는 그래도 오랜 관습처럼 카메라를 삼각대에 부착하고 500mm 망원렌즈를 마운트 했어요. 늙어 빠진 당나귀 같은 할망구를 봐서 뭐 하나? 하고 나 자신에게 질책도 해보고 회의에 찬 탄식도 쏟아내면서도 내 왼쪽 눈은 어느새 미련하게도 그녀를 조준하며 렌즈의 초점을 맞추고 있었어요. 그런데 참 이상하지요.



아침에 볼 때는 눈가에 잔주름이 자글자글하게 덮여서 그야말로 한물간 대폿집 늙은 작부 같은 여인이 다시 요염한 미시로 보이는 게 아니겠어요? 나는 몇 번씩이나 눈을 비비고 또 비비고 나서 렌즈의 초점을 다시 맞추어 보았지만, 분명히 늘 보아오던 그 여인이 틀림없었어요. 나는 다시 혼란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했답니다. 카메라 사용설명서를 읽어보고 렌즈 성능에 대하여 인터넷을 뒤지기도 했어요.



내 나이 이제 불혹인데 벌써 노안(老眼)이 되었나? 아니면 내가 지금 술을 마셔서 헛것을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는 세면을 하고 눈에 안약도 넣고 심호흡을 조절하면서 심장의 고동을 일정한 박자로 안정시켰어요. 그리고 다시 렌즈의 초점을 맞추었지요. 참말로 환장하겠더군요.



내 눈이 이상한 것인지 아니면, 그녀가 구미호(九尾狐)라 무슨 조화를 부린 것인지 분간이 안 가더군요. 나의 심장은 콩닥거리다가 점차 쿵덕거리며, 많은 양의 피가 전신으로 퍼져나갔어요. 이상하게 내 양 볼이 빨갛게 물드는 듯도 했어요. 이건 필시 귀신의 조화가 틀림없다고 판단되자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쫙 돋으면서 무서운 기운이 엄습해 왔어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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