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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부아빠 Apr 23. 2022

내가 사랑하는 것은 무엇입니까에 대한 답변.

50대가 되면서 ‘내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욱 흐리멍덩해졌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한 가지란 질문을 받았습니다. 간단한 질문인데 쉽게 답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행복해하는 것, 내가 사랑하는 것에 답변하기가 어려워졌습니다. 결혼 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은 더욱 힘들어졌습니다. 아내가 좋아하는 것이 내가 좋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행복해하는 것이 내가 행복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가족이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것이 내가 사랑하는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삶의 철학이 내가 사랑하는 한 가지란 질문에 답을 못 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나보다, 내 것 보다 우리의 것이 더 우선이 되었습니다. 내가 조금 불편해도 주변이 평화로우면 나도 좋은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주위 사람들이 행복하다면 나도 행복한 것이라 믿게 되었습니다. 중화요리를 주문할 때 역시, 짜장도 좋고 짬뽕도 좋아합니다. 짜장을 주문했는데, 짬뽕이 나와도 기분 좋게 먹고 나올 수 있습니다.


 50대가 되면서 ‘내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은 더욱 흐리멍덩해졌습니다. 내 감정과 기분보다 가족을 먼저 살피며 살아갑니다. 자녀의 필요와 요구가 내 선택과 필요가 되었습니다. 나만의 것과 내 감정을 최우선에 올려놓으면 왠지 모를 미안함이 밀려옵니다. 이런 삶을 살다 보니 ‘내가 사랑하는 한 가지’를 떠올려보아도 답변이 쉽게 생각나지 않습니다.


 내가 사랑하는 게 무엇인지를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사랑하는 것인지, 좋아하는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내가 행복해지고 즐거워지는 것이 무엇인지가 떠올랐습니다.


 나는 여행지에서의 새벽녘을 좋아합니다. 아니, 어쩌면 ‘사랑’합니다. 캠핑장에서의 이른 아침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상쾌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잠들어 있는 가족을 깨우지 않으려고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텐트의 지퍼를 엽니다. 텐트밖에는 어두움의 여운과 일출의 시작이 서로 뒤엉켜있습니다. 주변은 고요합니다. 캠핑장 주변 오솔길을 걷는 내 발소리뿐입니다. 발바닥 아래서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소리가 들려옵니다.


어둠의 끝자락과 어린 햇살의 기지개는 이른 새벽에 일어난 사람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권입니다. 걷다가 바람의 길목을 만나면  앉아서 바람을 얼굴과 몸으로 맞이합니다. 눈을 감고 바람과 놀다 보면 생활 속에서 근심·걱정이 가지런히 정돈되는 기분이 듭니다. 해결하지 못할 것 같은 문제의 해답이 생각나기도 하고, 고민하던 문제의 원인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내 삶의 모습을 반추하며 반성하기도 하고, 사과하고 용서를 구해야 할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이런 면에서 새벽바람은 나에게 머리를 맑게 하고 정신을 정화하고 마음을 깨끗하게 만드는 자양 강장제입니다. 이런 새벽을 나는 사랑합니다.


나라마다, 지역마다 새벽의 광경과 바람의 기분은 다릅니다. 여행을 가서도 새벽에 일어나 호텔이나 리조트 주변을 걷습니다. 지구는 하나고 태양도 하나이지만, 새벽 햇살과 바람의 기분은 모두 제각각입니다. 바닷가의 새벽은 파도 소리의 장엄함이 장관입니다. 새벽의 햇살도, 상쾌한 바람도 모두 파도를 타고 내게로 밀려옵니다. 바닷가 산책로를 걷다 보면 파도가 나에게 말을 걸어오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파도는 마음속에 숨겨놓은 근심을 이미 다 알고 있는 눈치입니다. 나는 새벽녘 바람을 타도 내게 말을 걸어오는 파도 소리를 사랑합니다.


산기슭의 새벽은 고요함이 장관입니다. 호텔 주변의 산책로는 아직도 가로등이 켜져 있습니다. 가로등을 따라 산책로를 걷다 보면 내 발자국과 숨소리만 들립니다. 어느 순간부터는 발자국보다 숨소리가 더 크게 들립니다. 숲이 우거진 길에서는 잠시 멈춰서 호흡을 크게 합니다. 그리고 주변의 나무와 풀을 자세히 관찰합니다. 숨쉬기를 천천히 하다 보면 나무 냄새와 풀 내음이 조금씩 올라옵니다. 이때부터는 걷기의 속도를 조금씩 늦춰서 걷습니다. 나무들이 바뀔 때마다 냄새도 다릅니다. 이름 모를 풀들이 흔들릴 때마다 풀 내음도 달라집니다. 산길에서 자연을 음미하다 보면 막힌 혈관이 뻥 뚫리는 것처럼 머릿속 어딘가에 ‘박하사탕’ 한 알이 박히는 것 같은 청량감이 생겨납니다. 나는 새벽녘 이슬과 버무려진 나무와 풀냄새를 사랑합니다.


 나는 이렇게 새벽을 사랑합니다. 하지만, 지금 가정에서는 새벽이 가장 힘겹습니다.


고1이 된 큰아들을 새벽마다 깨워야 합니다. 중학교 때보다 공부의 양이 많아졌습니다. 고등학교에서의 첫 시험을 치른 후 아들은 충격을 받은 모양입니다.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독서실과 문제집을 더 사달라며 스스로 공부를 하기 시작합니다. 문제는 공부한다는 이유로 생활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엄마에게 신경질을 부리기 시작합니다. 방 청소와 책상 정리도 엉망입니다. 귀가시간이 늦는다는 연락도 띄엄띄엄입니다. 부모와 상의하고 의논해야 할 일을 혼자서 결정하고 통보하기도 합니다. 밤늦게께 지 공부를 핑계로 휴대폰 사용시간이 길어졌습니다. 무엇보다도 아침 기상시간을 갈수록 늦어지고 있습니다.


공부하다 늦잠을 잔 큰아들은 일어나라는 아빠의 잔소리에 짜증을 내기 일쑤입니다. 나는 공부보다 성실한 태도가 우선임을 강조하며 아들이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갈 때까지 잔소리를 쉬지 않습니다. 6시 30분부터 7시 30분까지 큰아들의 행동 하나하나를 분 단위로 알려주며 서두르기를 강요합니다. 늦게까지 공부하느라 아침에 늦게 일어난다면, 차라리 공부를 줄이고 지각을 하지 말라고 잔소리를 합니다. 나는 아들이 집을 나서기 전까지 삶의 태도가 중요함을 강조하며 잔소리를 퍼붓습니다.


 이러다 보면 아들은 짜증 섞인 얼굴로 등교를 합니다. 나도 부지런히 움직이지 않는 아들을 보며 화가 납니다. 이런 삶의 패턴은 거의 매일 반복합니다. 평화롭고 고요한 새벽이 짜증과 잔소리로 채워지고 있습니다. 나는 새벽을 사랑하는 사람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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