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년간 다니던 직장에서 퇴사한 이후 프랑스에 3주간 머물렀다. 구체적으로 지내되 촉박하게는 지내지 말자는 생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보냈다. 그 시간 동안 경험한 것들을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샤를 드 골 공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오후 7시쯤이었습니다. 정신이 혼미한 상태로 꾸역꾸역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에 도착했을 땐 오후 9시가 되어갔지만 여전히 해는 저물지 않았습니다.
포토그래퍼인 호스트 아딘이 저를 맞이했습니다. 제가 앞으로 3일간 머물 곳은 아딘과 작가인 아딘의 파트너 데니스가 단둘이 사는 집이었습니다. 건물 안쪽에 정원이 있는 프랑스 특유의 구조 안에서 아딘의 집은 정원과 바로 연결된 1층에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정원 속의 별채는 남편의 작업실이었고, 볼록 튀어나온 통창 박스 구조의 공간에는 거실 소파가 놓여 있었어요. 이 집은 아딘이 오기 전까진 한 회사의 사무실로 쓰였습니다. 소파에 앉으면 초록빛 정원을 한눈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거기 앉아 커피를 홀짝 대는 아딘의 모습을 상상하니 파리에 온 것이 실감 났습니다. 아딘은 뿌듯한 표정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자신의 공간을 찬찬히 둘러보게 도와줬습니다.
제가 사용할 공간은 넓은 창이 돋보이는 방이었습니다. 사무실로 쓰이던 곳이어서 그런지 방한은 좀 안 되는 느낌이었지만 아딘의 딸 것으로 보이는 작업물들이 곳곳에서 눈에 띄어 흥미로웠습니다. 방 안 어디에서든 소품들을 소중히 대하는 아딘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 같아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숙소 투어 중 마침 아딘의 딸이 부엌에서 친구와 영상통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 애는 영상 속 친구를 'the boy I like'라고 표현하더군요. 자세히 들어보니 하프 멕시칸 썸남과 장거리 연애를 시작하려는 참이었어요. 이번 여름에 그 썸남을 만나러 간다고 합니다. 부끄러워한다기보다는 새로운 시작에 설레는 표정이었습니다. 그 애는 농업 관련 연구를 하면서 리옹 근교에 살고 있지만 종종 부모님을 보러 파리에 온다고 합니다. 리옹보다 파리에 친구가 많지만 닭 3마리와 함께 자연 속에서 사는 게 더 좋다는, 자연을 사랑하는 애였습니다. 왠지 잘 맞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어요.
그 애와 숙소 근처 공원으로 산책을 갔습니다. "같이 갈래요?"라는 제안을 거절하지 못한 탓에 14시간 비행에 지쳐버린 몸을 이끌고 따라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애를 따라 간 그 공원, 너무 광활해 숨통이 트이더군요. 비가 온 뒤라 진흙이 질척 질척 새로 산 신발에 들러붙는 데도 자꾸만 걷고 싶어지는 공원이었습니다. 아딘의 딸도 그 공원이 자못 자랑스러운지 이곳저곳 소개해 주더라고요. 그 공원은 구글 맵에서는 Lac de Saint-Mandé라고 나옵니다. Parc Floral de Paris, Bois de Vincennes 등 큰 규모의 공원들과 이어져 한없이 걸을 수 있습니다.
그 애와 가장 오래 머무른 공간은 작은 흙길 양쪽으로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는 그곳이었을 겁니다. 잔디밭은 울창한 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었습니다. 흙길을 따라 멀리 바라보면 시력검사용 이미지와 같이 비현실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됩니다. 그때 드디어 폰을 꺼내 들어 사진을 찍었습니다. 해가 아주 낮게 떠서 나무들의 그림자가 건너편 나무들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다웠습니다.
그렇게 한창 산책에 빠져 드문드문 대화를 나누던 중 공원 근처에서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지 쿵쿵 비트음이 들려왔습니다. 장르는 록(Rock) 같았죠. 그 애의 표정을 보니 언뜻 봐도 선호하는 장르는 아닌 것 같았습니다. "좋아하는 음악이 뭐야?"라고 물었습니다. 그 애는 tiny ruins의 음악을 추천해 줬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뉴질랜드 포크 음악이었는데 공원 산책과 그렇게 어울릴 수가 없었습니다. 닭 3마리와 함께 산다는 그 애와도 더없이 잘 어울렸죠.
하지만 처음 보는 사람과 1시간 동안 산책이라니, 저는 심신이 지친 상태로 잠자리에 누웠습니다.
자다 깨다를 반복한 첫날밤이었습니다. 추운 듯 해 가디건을 껴입었다가, 또 발이 시린 것 같아 양말을 신었다가, 도통 잠이 오질 않았습니다. 아마 첫날이라는 이유 때문이었겠죠.
정신도 차릴 겸 아딘과 아침 인사를 나누며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대화의 주제는 저의 미래였죠. 퇴사 이후의 계획을 같이 고민해 주던 아딘이었습니다. 한국에서는 저에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조언을 해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괜히 꼰대 소리 듣기 십상이니까요. 그런데 아딘의 눈빛은 초롱초롱했습니다. 제가 책방을 여는 것은 어떻게 생각하냐고 하니 "그건 행정적 잡무가 너무 많다"며 말리기도 하더군요. 또 제가 기자 일을 하면서 무엇을 즐겼는지, 취재했던 분야가 뭔지 등을 묻더니 극장이나 출판사 같은 데서 일해보라고도 얘기해 줬습니다. 아딘이 이런 얘기를 나누는 걸 진심으로 즐기는 것 같아 저 또한 속 깊은 얘기까지 털어놓고 싶은 마음이 생길 정도였습니다.
마지막으로 담당했던 분야가 가요였다는 얘기가 나오니 아딘은 한국 아티스트 이자람 밴드가 자신의 숙소에 종종 묵는다고도 말해줬습니다. 그러면서 이자람 밴드의 CD를 틀어줬는데 반갑더라고요. 다행히 제가 좋아하는 종류의 음악이었습니다. 여행에서 음악은 빠질 수 없으니 저의 여행 테마곡 리스트에 그들의 곡을 추가했습니다. 그들은 왜 파리에 왔을까? 상상을 해보기도 하고요.
아딘 덕분에 파리의 삶에 깊숙이 발들인 듯한 기분을 만끽하며, 저는 책방 Shakespeare and Company로 향했습니다.
... <퇴사 후 프랑스에 갔다 - 2. 파리 책방과 미술관>에서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