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원경을 들고 가지 않은 뮤지컬 뉴비의 최후
You will be found by a telescope
2층에서 에반 헨슨의 표정을 알아보느라 눈이 빠질 뻔했다. 뮤지컬을 혼자 보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배우들이 혼신을 힘을 다해 연기한다는 마지막 공연을 6만 원에 예매했다. 2층이라 다른 좌석에 비해 값이 싼 만큼 멀리서 보겠지만 뭐 어떤가. 뮤지컬을 혼자 즐김에 의의를 두자, 하고 반팔에 반바지를 입고 멋지게 빼입은 관객을 뚫고 예매했던 표를 받은 뒤 2층에 올라가 자리에 앉았다. 아, 드디어 뮤지컬을 혼자서 보는 날이 오는구나. 준비되어 있는 무대에서 어떤 장면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무대를 한참을 응시했다. 음... 좀 멀긴 하네. 뮤지컬이니까 배우들이 노래 부르는 걸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하려나.
"철커덕"
뭔 소리지. 기계를 펼치는 듯한 소리가 옆자리에서 들렸다. 옆에 앉으신 분이 망원경을 펼치는 소리였다. 야, 이 분은 뮤지컬에 진심이시구나. 망원경까지 준비하시다니... 나중에 한 번 빌려달라고 해 볼까? 싶었는데,
철컥, 철컥, 철컥. 소리가 사방에서 났다. 뭐지? 앞 분도 망원경, 왼쪽 분도 망원경, 대각선 방향 멀리 계신 분도 망원경. 뭔가 이상하다. 망원경을 옆 분에게서 처음 발견했을 때 들었던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나만 안 가져온 거야...?? 그런 거야..?
이 정도로 많은 분이 가져오는 거라면, 2층에서 망원경은 필수인 것 같은데. 극장 내에서 구매가 가능한 건가? 나도 지금 구하러 나가봐야 하나?...라고 하기엔 이미 공연은 시작되었고, 에반 헨슨은 "오늘은 멋있는 하루가 될 거야"라고 독백을 시작했다. 배우의 목소리는 들린다. 배우가 어디로 움직이는 지도 보이고 소품이 슝슝 알아서 움직이는 것도 아주 잘 보인다. 근데 배우의 표정 연기가 보이질 않는다. 미간을 아무리 찌푸려도 도저히 보이질 않는다. 너무 답답했다. 배우가 연기를 하고 있는데 표정을 볼 수 없다니! 이러면 무표정으로 연기하는 배우로 구성된 무대를 보는 것과 뭐가 다르단 말인가.
1부 공연이 끝나니 머리가 지끈거렸다. 한정된 공간에서 조그맣게 보이는 사람의 움직임을 계속 응시하고 있어서였을까. 쉬는 시간이 15분 정도 되었는데, 10분 동안 배우의 표정 연기를 볼 수 없다는 사실에 안타까워하며 옆 분에게 양해 구하고 잠깐만 빌려달라고 할까? 근데 그분도 써야 할 텐데... 따위의 고민을 계속하다가, 5분쯤 남았을 때 결단을 내렸다. 나가서 망원경과 조금이라도 관련된 게 있는지 찾아보자. 2층에는 아무것도 없다. 있는 거라곤 망원경 소유자들이 기쁜 마음으로 포토 부스에서 사진 찍는 광경 말고는 없었다. 빨리 그들처럼 되어야 한다. 1층으로 내려갔다.
"오페라 글라스 대여소"
망원경.. 은 아니지만 글라스면 망원경 역할을 할 테니까 저기서 빌릴 수 있겠다! 싶어 대여 방법을 살펴봤다. 앱을 깔고 인증 번호를 받고 그걸 보여주고.... 꽤나 복잡해서 애를 먹고 있는데,
"혹시 오페라 글라스 대여하시나요?"
"네네"
"오프라인으로도 가능하세요. 대여료 3000원이고요, 신분증 맡겨놓으시면 됩니다."
급하게 나오느라 신분증이 없었다. 사실 급하게 나오든 말든 신분증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 폰을 맡겨놓기로 했다. 어차피 공연 중에는 폰을 쓸 수 없으니까.
"넵 혹시라도 고장일 수 있으니 여기서 초점 맞춰보시고 괜찮으시면 사용하시면 됩니다~"
"네네!!"
초점 맞출 시간? 없었다. 드디어 배우의 표정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광적으로 설레서 2층으로 뛰어 올라갔다. 자리에 앉자마자 망원경을 꺼내서 눈에 갖다 댄 뒤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공연장 배경에 나와 있는 에반 헨슨이 보낸 문자 내용이 선명하게 보였다. 배우 표정은 얼마나 잘 보일까. 맨눈으로만 보는 1부 공연보다 망원경으로도 볼 수 있는 2부 공연이 더 재미있었다. 망원경으로 공연을 보면 시야가 좁아져 전체적인 분위기, 배우들의 전체적인 이동 동선을 파악할 수 없다는 단점은 있으나, 파악이 어렵다면 망원경을 떼고 맨 눈으로 보면 그만이다. 다만 배우의 표정 연기를 망원경으로 볼 수 있다는 장점은 1층에서 본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된다. 무대가 가깝다면 망원경이라는 추가적인 장치가 필요 없이도 무대의 분위기, 그 분위기를 만드는 배우들의 표정 연기를 맨 눈으로 모두 즐길 수 있다. 망원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것 자체가 1층 좌석의 값어치이다.
다음에 뮤지컬을 보게 된다면 반드시 1층으로 갈 것이다. 2층에서 봐도 된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할인 티켓을 사는 게 아니라, 1층에서 제대로 즐기겠다는 비장한 마음으로 정가 티켓을 사서 뮤지컬에서 즐길 수 있는 모든 것을 즐기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