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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몽

소란스럽지 않은 사랑

by 정운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지금까지 자몽을 참 좋아한다. 어린아이 입에는 씁쓸했을 자몽인데도, 나는 어느 과일보다도 자몽을 잘 먹었다. 여전히 오렌지나 레몬에 비해 값이 나가긴 하지만, 사람들의 소득 수준과 삶의 질이 높아지면서 자몽은 꽤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과일이 되었다. 하지만 내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약 25년 전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그 당시 자몽은 꽤 비싸고 귀한 과일이었다.


그런데 나는 아빠의 오랜 친구였던 K 아저씨 덕분에 일찍부터 자몽 맛을 알게 되었다. 모두가 어렵던 시절, 아저씨 역시 사정이 넉넉하지 않았을 텐데도 우리 집에 올 때마다 크고 둥근 자몽을 비닐봉지 가득 담아 오셨다. 아저씨가 건네는 묵직한 자몽 봉지를 엄마는 미안함과 고마움이 섞인 얼굴로 받아 부엌으로 갔다. 그리고 깨끗이 씻어 쟁반에 담아왔다.


칼집을 슥슥 내어 두꺼운 껍질을 벗기면 향긋한 자몽 향이 온 집안에 퍼졌다. 엄마는 일일이 속껍질을 벗겨 부드러운 자몽 속살을 접시에 담아주었다. 탱글탱글하고 싱그러운 붉은 속살. 한 입 베어 물면 쓴맛 하나 없이 달콤하고 시원했다. 작은 입으로 오물오물 먹다 보면 손이 불기도 하고, 옷에는 과즙이 묻어 물들기도 했지만 행복했다.


그런 어린 ‘자몽 킬러’ 앞에는 K 아저씨와 엄마, 아빠의 너털웃음과 흐뭇한 얼굴이 있었다. 그리고 문득, 그것이 사랑이었구나 싶었다. 얇아진 지갑에 한숨이 나오면서도, 단단한 껍질을 벗기고 과육을 발라내느라 손이 엉망이 되더라도, 접시 위 자몽 한 조각에 활짝 웃는 얼굴을 보면 그런 걱정과 수고쯤은 까맣게 잊어버리게 되는 사랑.


나는 그런 소란스럽지 않은 사랑 속에서 자랐다. 그리고 나는 지금도 그런 사랑이 좋다.


추운 밤, 내 자리에 미리 따뜻한 물주머니를 넣어주고, 팔이 저려도 잠들 때까지 팔베개를 해주는 사람과 함께 살고 있다. 나 또한 그를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며 운전을 배우고, 인터넷으로 그가 좋아할 만한 요리를 찾아 새롭게 시도하곤 한다.


화려하고 요란한 사랑도 좋다. 하지만 사랑이 반드시 소란스러울 필요는 없다.


사진 출처 Unsplash_Isaac Quesa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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