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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

물속에서 물 밖으로 : 생각과 감정을 '보는' 방법

by 정운

나는 기분이 가라앉을 때 일기를 쓴다. 하루의 일정을 적기도 하고 어떤 주제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쓰기도 하며, 스스로를 향한 다짐을 적거나 어떤 사물, 사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을 때도 있다.


어렸을 적 나는 일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방학 숙제 중 가장 하기 싫은 것이 일기 쓰기였다. 개학 전날 20개의 일기를 몰아서 썼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마지막 문장은 항상 “즐거운 하루였다.”로 끝났는데, 그 많은 일기를 억지로 꾸역꾸역 썼던 어린 나를 생각하니 짠하기도 하고 웃음도 난다. 그 당시 어린 나는 일기를 왜 써야 하는지, 그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다 서른을 앞둔 나이가 되어 자발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비로소 일기의 의미를 조금씩 알아가기 시작했다. 지금은 스스로도 낯선,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이 되었다. 물론 사람마다 일기를 쓰는 이유나 얻는 기쁨은 다르겠지만, 내게 있어 일기의 의미는 ‘시각화’에 있다.


나는 일기를 통해 내 생각과 감정을 시각화한다. 나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생각하는 주체가 나 자신이고, 그 모든 과정이 내 머릿속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기분이 가라앉거나 속상한 일이 생기면, 나는 내가 느끼는 감정이 무엇인지 분명히 안다고 믿었다.

하지만 일기를 쓰기 시작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사실,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가 어떤 감정이나 생각에 깊이 빠져 있을 때는 마치 물속에 있는 것과 같다. 물밖 상황은 전혀 보이지 않고, 물살에 휩쓸리듯 생각과 감정 속에 잠긴다. 일기를 쓰는 일은 물 밖에서 그 상황을 바라보는 일과 같다. 마치 지도 앱의 항공뷰처럼, 혹은 내비게이션처럼. 글로 내 생각과 감정을 적어 내려가며 그것들을 눈으로 확인하게 되면, 내가 빠진 물이 어떤 물인지 비로소 객관적으로 볼 수 있게 된다. 바다에 빠진 줄 알았는데, 사실은 물이 찬 세면대에 코만 박고 있었던 적도 있고, 무릎까지 오는 얕은 물이라 안심했는데 곧이어 폭포로 떨어질 상황이었던 적도 있다. 그렇게 나의 내면 이야기를 글로 꺼내면서, 오히려 나를 제3자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일기를 쓰며 나는, 지난밤 잠을 이루지 못할 만큼 걱정했던 일이 알고 보니 고민할 필요조차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기도 하고, 도저히 납득할 수 없던 일이 글로 적고 보니 오히려 명확해져 더 이상 설득할 필요 없이 고개를 끄덕이게 되기도 했다. 며칠을 우울하게 했던 감정의 원인이 사실은 전혀 다른 곳에 있었다는 걸 알게 된 적도 있었고, 스스로 무심코 한 행동이 새삼 기특해져 나 자신을 토닥이게 된 날도 있었다.


길을 잃었을 때는 마음의 목소리를 들으라고 했던가. 우리의 영혼은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 필요한 것을 알고 있다. 나 자신을 알고 싶다면, 마음에 쏙 드는 노트와 쓰는 쓰는 즐거움이 있는 펜 하나를 준비하자. 나 자신과 마주하는 이 공간은 세상에서 가장 편안하고 나다운 공간이어야 한다. 그리고 오로지 나만을 위한 내 마음의 목소리를, 깨끗한 새 페이지 위로 초대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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