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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초록

물들지 않는 힘

by 정운

H와 점심을 하며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H는 작년에 나와 같은 시기에 박사과정을 졸업하고, 현재는 박사과정을 했던 연구실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우리는 대학원생 신분을 벗어났지만 우리의 대화 주제는 여전히 대학원에 머물러있다. 주로 지도 교수님을 포함한 연구실 동료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번 점심에도 잠깐 비슷한 이야기가 나왔다. 어딜 가도 그렇지만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들과 함께 지낸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고, 특히나 그 결의 차이가 성격의 차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상대를 대하는 ‘태도’에 대한 것이라면 더욱 심란해진다. H의 연구실 사람들에 대해서는 꽤 오래전부터 들어왔는데, 한결같은 폐쇄적인 태도로 H를 대하고 있고 그 때문에 처음에는 상처를 받기도 했지만 이제는 무뎌져 버린 H였다. 나는 그런 H에게 내 생각이랍시고 이전에 남편과 나누었던 이야기를 건넸다.


“근데 결이 완전히 다른 사람을 만나는 건 진짜 고통스럽지만 그래도 필요한 일인 것 같아. 내가 좋은 비유를 떠올려봤는데 들어볼래? “

“응, 뭔데?”

“봐봐, 만약 네가 초록색이라면 너의 곁에 너와 비슷한 연두색이나 청록색이 많긴 할 거야. 그리고 그들과 함께하면 비슷하니 마음이 편하겠지. 깊이의 차이가 있을 뿐 대체로 비슷한 느낌이니까. 근데 문제는 그거야, 비슷한 사람들끼리만 있으면 내가 쟤보다 연하다 혹은 짙다 정도는 알아도 내가 무슨 색인지는 알기 힘들 거야.”

“응.”

“근데 네가 너와는 완전히 다른 빨간색을 만난다고 치자. 그러면 넌 그때 알게 되겠지. 아, 나는 ‘초록‘색이구나. 너와 다른 색을 마주침으로써 비로소 너의 색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해. 그러니까, 완전히 다른 결의 사람과 함께하는 건 가끔 꽤 힘들지만 그래도 우리 인생에 무척이나 중요하고 도움이 된다는 점에선 위로가 되기도 하더라고.”


이렇게 적고 보니 그 당시의 나의 말은 무게도, 감동도, 위로도 없는, 그저 스스로 깨어있는 척 내뱉은 것에 지나지 않는 듯해 더욱 부끄럽다. 그런 나의 말을 미소로 듣던 H는 특유의 무해한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근데 그 빨간색들이 나를 물들여, 그래서 나는 초록색을 잃고 검은색이 되어가는 기분이야. 헤헤.”


이 대답에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졌고 곧 아이스커피 속 얼음이 녹으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와 함께 돌아왔다. 우리는 “그러게, 검은색이라니, 빛의 삼원색이 아니라 색의 삼원색이 되어버렸네 안타깝게도. 하하“라며 웃었다.


그러게, 나도 느낀 적이 있었는데, 나와 지독히도 맞지 않던 대학원이라는 그 환경에서 나 스스로도 나를 잃어버리는 것 같다고 느꼈었는데, 그래서 그때 받았던 많은 위로 중 나를 가장 지탱해 주었던 그 한 마디를 지금까지도 내 마음 깊숙한 곳에 간직해오고 있었는데, 왜 나는 그때 너에게 그 말을 건네지 못했을까. 아니, 또다시 네게 건넬 말 따위는 그만 접어두고 마음으로 조용히 너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H야, 지금은 그 안에서 뒤섞이고 물드는 것 같지만, 너의 초록은 쉽게 물들지 않아. 사람의 성품이란 것이 그렇다더라. 근데 정말 물이 드는 것 같을 때가 있거든 어떻게 해서든 너의 초록을 지켜내자, 물들지 않도록. 그게 전부야. 형편없고 못된 그 가치 없는 마음들 때문에 너를 잃지 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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