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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리지만 진한 하루

'더 많이' 보다 '천천히, 충만하게'

by 정운

이른 아침 6시.

여름이라면 이미 새벽빛이 공기를 푸르게 물들였을 시간인데, 요즘의 6시는 밤의 장막이 아직 걷히기 전이라 까맣기만 하다.

아침 회의가 있어 일찍 출근한 남편 덕분에 나도 부지런한 사람들만이 느끼는 묘한 뿌듯함을 품고 하루를 조금 더 일찍 시작했다.


따뜻한 녹차 한 잔과 느긋한 재즈를 배경으로 아침 일기를 쓰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일찍 일어났으니 시간이 많네. 오늘은 피아노도 치고, 책도 더 읽고, 일본어 공부도 더 하고, 영어 공부도 하고, 청소도 챙기고….’


생각이 꼬리를 물자, 사람의 본성이란 참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하는 생각이 스쳤다.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나는 늘 스스로를 조금씩 조급하게 만든다.
더 많이, 더 잘, 더 완벽하게 해야 한다고.
마치 오늘이 어떤 프로젝트의 마감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하루를 빈틈없이 채워 넣으려 한다.
그러지 말아야지, 조금 천천히 가야지 하면서도 말처럼 쉽지 않다.
30년 가까이 몸과 마음에 밴 습관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알찬 하루도 물론 좋다.
하지만 나는 ‘채워진 하루’보다 ‘충만한 하루’를 더 좋아한다.
할 일 목록을 빠짐없이 체크하며 성취감을 차곡차곡 쌓는 하루도 좋지만,
내가 무엇을, 어떻게, 왜 하고 있는지를 온전히 인지한 채 그 순간에 여유롭게 몰입할 수 있는 시간이 더 좋다.
여백이 있고 빠르지 않지만 진하게 흘러가는 하루가 더 좋다.


천천히 흘러가는 하루 속에서 나는,

점심 식사 후 마시는 향긋한 커피가 내 손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정성 어린 손들을 거쳤을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 아래 빛나는 고양이의 귀의 작은 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할아버지와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며 유치원에 가는 아이의 생기 가득한 얼굴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그런 것들을 생각하고, 감사하고, 음미할 수 있다.

빨리 가려는 나를 또 다른 내가 조용히 돌려세운다.
우리는 모두 각자의 길을 걷는 사람들이고 사실 아무도 나를 쫓아오지 않는다고.
그러니 서두를 필요 없다고.
시간은 충분하다고.


나는 오늘 ‘더 많은’ 일을 하기보다

‘더 여유롭고, 더 충만한’ 순간들로 하루를 채우기로 한다.


사진 출처 Unsplash_Kristina Yadyki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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