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같은 시간'
그 아이가 다음에 나에게 건넨 말,
'전화번호 좀 알려주지 않을래?'
눈앞에 작은 노란색의 핸드폰이 그 아이의 손과 함께 있었고, 나는 그 아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 번호를 그 아이의 핸드폰에 입력하였다.
내 번호를 저장한 그 아이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번호를 교환하고, 간단한 인사와 함께 예배를 마치고 헤어졌다.
집에 돌아가는 길,
그냥 기분이 너무 좋았었기에 어머니와 함께 차를 타지 않고 집까지 걸어갔다. 집 앞에 도착해서도 너무 들떠있어서 한참을 밖에서 산책을 하다 집으로 들어갔던 기억이 있다. 그 새벽에 집에 들어가 혼자 전전긍긍하며 간단한 인사말을 문자로 남기고 잠이 들었었는데, 다음날 아침 답장이 와있었고 자연스럽게 문자를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 아이의 그 작은 행동 하나가 나의 일주일을 차고 넘치게 행복하게 만들어주었고, 그렇게 매주 철야예배와 주일예배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만들어놓았다.
처음 그 아이를 보고 나서부터 10년에 가까운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서로 대화를 하게 되었고, 조금씩 친해질 수 있는 계기가 생기게 되었다. 처음 번호를 주고받은 뒤 며칠간은 저녁시간에 조금씩 문자를 하기 시작했고,
시간이 조금 더 지난 후에는 저녁때 전화를 하기 시작했었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 전화를 해서 늦게는 새벽 4시 정도까지 통화를 할 때도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그냥 루틴이라고 생각될 정도로 매일 저녁 통화를 하며 지내게 되었다. 물론 단순한 루틴 그 이상의 의미가 나에게는 있었고, 매 순간이 행복하다 느꼈던 것 같다. 그 많은 통화들을 나누며 서로에 대해 꽤 많이 알게 되었고, 그렇게 많이 친해지게 되었는데, 한 번은 참 별거 아닌 것들에 대해 대화를 하면서, 나도 모르게 메모장에 적어두기도 하였다.
콜라보다는 사이다를 좋아한다.
당근은 절대 익히지 않으면 먹지 않는다.
짜장면보다는 짬뽕을 좋아하고, 짬뽕에 들어간 양파를 좋아한다.
문자보다는 전화를 좋아한다.
놀이공원에 가는 것을 좋아한다.
산보다는 바다를 보는 것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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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도 오래전 이야기이기에 전부를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그 아이가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들을 메모장에 적어두곤 하였다. 교회에서는 많은 대화를 나누지 못하고 예배에 집중하는 편이었고, 예배가 끝난 후 돌아와서 전화를 통해 많은 이야기들을 나누었다.
그렇게 조금씩 더 그 아이에 대해 알아가고 있었다.
우리는 3달 남짓한 사이에 정말 친한 친구가 되어있었고, 나는 그 아이의 영향을 받아 더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있었다. 한 번은 40일 작정 새벽예배가 시작되는 기간이었었는데, 그 친구가 먼저 내기를 제안했다. 40일의 새벽예배 기간 중 누가 더 많이 출석하는지. 내기에 지는 사람이 이긴 사람의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하였다. 새벽에 예배를 드리고 학교에 가는 것도 상쾌한 마음에 너무 감사했지만, 무엇보다 그 친구와 함께 새벽예배를 드린다는 것이 기분이 좋았었기 때문에 매일 새벽에 눈을 뜨기 위해 노력했다.
총 40일의 새벽예배 중 나는 38일, 그 아이는 34일 정도를 출석했다. 중간에 감기가 심하게 걸려 이틀이란 시간을 출석하지 못했지만, 나머지 38일간 매일 새벽 그 친구에게 전화하여 깨워주며 예배를 나가곤 했다.
내기에서 이긴 기쁨보다는 1달이 조금 넘는 기간 동안 함께 새벽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는 사실이 더 좋았던 것 같다. 그리고 함께 출석한 그날들마다, 우리는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조금 한 뒤 서로의 학교로 등교를 했었다. 4시 50분에 시작한 새벽예배는 6시가 되기 조금 전에 끝났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와 가까운 도서관에 가서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를 공부하고 등교를 했었다. 항상 같은 시간에 도서관에 가서 1번 2번 자리에 앉아 서로 노래를 들으며 공부를 했었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 그 친구가 들려준 노래를 지금도 즐겨 듣고 있다.
박기영 - 그대 때문에
라는 노래였는데, 도서관에서 둘이 함께 공부를 할 때 그 친구가 자신의 이어폰을 건네주며 들어보라고 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 들었던 노래였다. 그리고 그 친구 덕분에 박기영은 지금도 나의 최애가수이고, 그녀의 노래는 지금도 전부 다 플레이리스트에 들어있다. 당시에는 그 친구에게 참 많은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짧은 시간에 많은 대화를 나누고 정말 친해졌기에 지금도 그때 느끼던 감정은 쉽게 잊히지 않는 것 같다. 40일 새벽예배 끝나고 난 뒤에는 우리도 도서관에 다니지 않았지만, 여전히 가까운 친구였고, 매일 문자도 전화도 하고 지냈다. 그러다 한 번은 학교 개교기념일로 인해 집에서 쉬고 있는 날, 특별한 이벤트와 같은 일이 생겼었다. 아침에 조금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어머니의 심부름을 하고 집으로 돌아와 영화를 한 편 보기 위해 책상에 앉아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밖에서 갑자기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것 같아서 안방 창문으로 뛰어가 창 밖을 내다보았다. 세상에, 거기에는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맨 채 서있는 그 친구가 서있었다. 나는 너무 깜짝 놀라서 얼른 집 밖으로 뛰어내려 갔고 그 친구를 맞이했는데, 그때 나는 사고정지가 와서 어떻게 된거냐고 묻지도 않고 일단 친구를 집으로 초대했고, 점심을 먹지 못했다고 하여 라면을 끓여주고 밥 먹은 동안 대화를 나누다, 그 친구 학교도 단축수업을 해서 4교시를 마치고 서프라이즈로 놀러 왔다는 사실을 듣게 되었다. 친구가 식사를 다 마치고나서는 내가 보고 있던 영화를 같이 보게 되었는데, 하필 그때 본 영화가 '미스터 소크라테스' 였던걸 제외하면 모든 상황이 다 괜찮았던 것 같다. 영화를 다 보고 그 친구와 함께 밖에서 산책하며 대화를 하다 집에 데려다주고 돌아왔었는데, 세월이 한참이나 지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마냥 신기하고 놀랐던 게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나는 그 친구와 대화하는 것, 산책하는 시간을 너무나도 사랑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시절 우리가 가장 가까웠던 시간이 아니었을까 한다. 남녀라는 성별을 제쳐두고서 그때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장 좋아하던 사람이 그 친구였었고, 그때 그 친구에게 하지 못했던, 담아두었던 말들이 어긋난 타이밍과 후회로 다가올 순간들을 감히 짐작도 못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나에게는 그 시간들이 모두 꿈만 같았고 즐거운 하루하루였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