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긋난 타이밍'
나는 그 꿈같은 시간들을 그저 그렇게 보내기만 했다.
그 친구와 나의 사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릴만한 그 무엇도 하지 않았다. 나는 나 스스로 그 친구를 좋아한다고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냥 다른 친구들보다 조금 더 특별하고 가까운 사이라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은 점점 흘러가고 내 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은 생각지도 못하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2학년에서 3학년이 되었고 여전히 우리는 가까운 친구사이였으며, 함께 친해진 친구들 또한 여럿 있었다. 특별한 사건이나 사고 없이 수능시험을 보고 각자 진학할 대학교를 정한 뒤, 고등학교 3학년의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무렵 교회 중고등부에서는 '참빛제'라는 축제 준비가 한창이었다.
축제 준비를 하는 동안 밤을 새워가며 준비할 것들이 있었는데, 나를 포함한 남자 둘, 그 친구를 포함한 여자 둘, 이렇게 4명이 함께 밤동안 축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밤새 수다를 떨며 축제 준비를 마치고, 다음 날 아침이 왔을 때, 나는 내 마음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에는 나와 같은 나이의 친구들이 여럿 있었는데, 축제 당일 아침 밤을 새우며 준비한 탓에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꾀죄죄한 상태로 하나둘씩 오는 친구들과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그중 한 남자아이가 모습을 보였을 때, 그 친구의 반응이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것과는 많이 달랐었다. 피곤한 모습의 자신의 얼굴을 그 남자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아 했고 계속 그 남자아이를 피해 다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내가 진짜 많이 그 친구를 좋아했었구나를 느꼈던 게. 2년의 가까운 그 많은 시간들은 항상 나의 편에 서있었는데, 나는 그 모든 시간을 그저 흘려보내기만 했을 뿐, 어떠한 노력도 하지 못했다. 그날의 나는 가슴에 바위 하나가 들어앉아있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그 답답함이 사람을 얼마나 힘들게 할 수 있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 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의 시간과 함께 기회는 지나가버렸고, 나는 그저 담담한 척하며 그들을 축복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둘은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귀게 되었고, 우리는 모두 20살의 대학생활을 시작하기 위해 모두 흩어지게 되었다.
새로운 시작과 새로운 다짐들과 함께 시작한 대학생활은 나쁘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씩 지나는 만큼 답답함은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대학에서 처음 만나는 강의와 사람들에 정신없는 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그 정신없는 와중에 인연과 우연이 겹쳐, 연애를 시작하게 되었다. 대학입학 전 O.T에서 만난 수학과 친구의 소개로 인해 만난 친구와 만나게 된 것인데, 새로운 시작을 반기던 나에게는 더할 나위 없는 만족감으로 다가온 연애였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대학생활과 연애에 매진하던 순간에 잊고 있던 그 친구와 연락이 닿게 되었다. 당시에 나는 기숙사에 살고 있었는데, 과제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네이트온이라는 메신저를 사용했었는데, 갑자기 많이 익숙한 이름으로 메시지가 날아왔다. 바로 그 친구였다. 그 친구가 연애를 시작하는 순간부터 따로 연락을 하지 않았었는데, 4-5개월 만에 연락이 온 것이었다. 지금도 기억나는 게 그 친구의 연애가 50일이 되는 날, 나의 연애가 1일 차였던 기억이 있다. 내 연애가 한 달 조금 넘었을 시점에 그 친구에게 연락이 온 것이었다. 처음에는 서로 안부를 묻기에 바빴다. 잘 지냈는지, 학교 생활은 어떤지, 교회는 잘 나가는지.
그리고 나는 그녀의 남자친구의 안부를, 그녀는 나의 연애 소식을 다른 친구로부터 전해 듣고 나에게 축하를 전해주었다. 그렇게 오랜만의 연락을 하게 된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로 잠시 돌아갔던 것 같다. 그렇게 옛날이야기를 잠시 나누던 중, 나에게 가장 혼란스럽고 충격적이었던 한 문장이 그녀의 메시지로 날아왔다.
'난 그때 너 좋아했었는데.'
생각해 보면 고등학교 시절 새벽까지 나눴던 통화, 말도 없이 갑자기 집에 찾아오는 행동, 매일 같이 새벽예배를 드리고 같이 도서관에 가던 일, 그녀가 보낸 그 한 문장에 아무런 눈치조차 채지 못했던 고등학교 시절의 내가 너무 바보 같았고 멍청해 보였다. 그저 친하다는 이야기로 저 모든 일들을 설명해 버렸던 내가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었다. 마치 마법에라도 걸린 문장인 것처럼 저 한 문장에 내 사고는 정지했고, 내내 고민 끝에 내가 뱉은 말은,
'그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라는 문장으로 답을 돌려주었다.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후에 다른 친구에게 그녀가 이별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당시의 나도 연애를 하고 있었고, 우리가 나눈 이야기는 그저 추억으로 남은 옛이야기라고 생각했기에.
또한 그때는 내가 보낸 저 문장이 가장 멋있어 보이고, 쿨 해 보였을 거라고 생각했기에.
결론을 얘기하자면, 내가 참 나쁜 놈이라고도 생각하지만 저 순간을 두고두고 후회하며 살아왔다.
마법 같은 저 문장을 나에게 보낸 그녀의 생각은 감히 내가 짐작할 수 도 없지만, 그래도 그때 모든 걸 뒤로 하고 잡아볼걸이라는 생각. 뒤늦게 부질없는 상상들이지만 사는 동안 내내 후회하곤 했다.
그렇게 나와 그녀의 타이밍은 이미 어긋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날 그녀의 메시저가 온 뒤의 우리는 다시 예전 같은 친구로 돌아갔고 가끔씩 연락을 하며 지냈다. 그리고 얼마 후 친구들의 뜻밖의 제안으로 인해 잊을 수 없는 이야기가 또 하나 생기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