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가들이 사랑한 샤갈의 마을
꿈에 제주 나인브릿지에서 골프를 쳤다.
세 홀을 남겨 두고 1 오버파, 드라이버 친 샷이 잘 나왔는데 세컨드 샷이 길어 파 온을 못했다. 그렇게 개 꿈을 꾸다가 잠이 깼다. 좋아하는 골프를 안 친지 꽤 되었다. 사람들이 골프에 탐닉하는 이유는 쉬워 보이는데 맘먹은 것처럼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다 행운처럼 멋진 샷이 나왔을 때의 성취가 주는 달콤함과 금방 재현할 수 있을 것 같은 착각 때문이기도 하다. 골프는 내게 기대한 대로 되지 않은 결과를 담담히 수용하고 그다음을 준비하는 마음가짐을 가르쳐 준 운동이다. 그래서 나는 골프공이 놓여있는 그대로 두고 치려고 한다. 공을 조금만 옮겨도 한결 수월할 수 있지만 현실과의 담담한 직면을 골프를 통해 배운다.
아침으로 마트에서 산 삼양라면을 파송송은 못하고 계란 하나 풀어 끓였다. 현지화 한 식품들은 다 짠 것 같다. 비비고 김치 만두도 짜더니 라면도 짜다. 정작 프랑스 식당에서 먹은 음식들은 짜다는 생각이 많이 안 들었는데, 그냥 한국의 맛 그대로 가져오는 것이 어떨까 생각을 해 봤다. 싱거우면 그들이 소금을 뿌려 먹으면 될 텐데, 억지로 맞출 필요가 있나 싶다.
오늘은 유서 깊은 중세 마을 ‘생폴 드 방스’를 간다. 니스에서 차로 40분 정도라 부담이 없다. 마을 근처에 와서 어렵지 않게 주차를 했다. 3시간을 결제하고 마을로 향하는 데 현지의 시스템에 적응했다는 뿌듯함에 발걸음이 가볍다.
<생폴 드 방스>는 성벽으로 둘러 쌓여 중세 모습을 잘 간직한 마을이다. 2차 대전 후에 많은 예술가들이 이 아름다운 마을로 피난 오면서 예술가의 마을이 되었다고 하며 최근까지도 유명 예술가와 셀럽들이 거주한 마을로도 유명하다. 샤갈이 여기서 19년을 살다 마을 공동묘지에 묻혀 ‘사걀의 마을’이라고도 한다.
마을로 들어가는 길의 바닥부터 예사롭지가 않다. 맨질맨질한 검은 자갈로 모자이크 한 모양이 얼핏 보면 곰 발바닥 같고 또 달리 보면 지중해의 강렬한 태양을 옮겨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마을로 들어서니 예술가들이 사랑한 마을답게 골목길의 양쪽으로 갤러리, 아뜰리에와 독특한 기념품을 파는 상점들이 많아 마을 전체가 미술관 같다. 갤러리와 상점을 둘러보는 것으로도 감각이 풍성해지고 업그레이드되는 기분이다. 유리 공예 상점 안에서 사고 싶은 꽃 병이 있어 한 참을 보고 있었더니 15% 깎아 주겠다고 제안을 한다. 가져갈 방법 때문에 망설인 건데.
마을의 가장 높은 곳에는 분수대와 오래된 예배당이 있다. 천천히 마을을 돌아 식사할 곳을 찾는다. 성 밖 시골마을이 내려 보이고 라일락이 드리운 멋진 테라스의 식당에 들어가니 자리가 없다. 다른 레스토랑도 형편이 비슷해서 빵가게에서 아이 팔뚝보다 굵은 바게트 샌드위치와 제로콜라 한 병을 샀다. 마을의 서쪽에 알프스가 보이는 계단에 앉아 몇 입을 먹다가 걸으며 먹어도 될 것 같아 성벽을 따라 걸으며 바게트 빵을 뜯었다.
안전장치도 없는 좁은 성벽 위를 걸어 마을의 안쪽으로 오니 공동묘지가 있다. 입구에 모양 좋은 표지석에 무덤의 번호가 적혀 있다. 샤갈은 152번이고 433번이 마지막 번호다. 샤갈의 묘는 크지도 세련되거나 멋있지도 않다. 그저 1/434의 공간을 차지한 오래된 묘석에는 자갈과 관광객들이 두고 간 하트모양 테두리를 한 돌멩이 안에 동전이 있다. 묘지를 한 바퀴 돌아보고 돌멩이 하나 주워 샤갈의 묘에 얹어 두고 나왔다.
어제오늘 니스의 동쪽과 서쪽의 두 중세 마을을 보며 문명이라기보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자연과 그 속에 살아온 삶에 대한 의지와 열정 같은 걸 본 것 같다. 그게 무엇인지 가늠은 안되지만, 생존을 위한 피난생활에서도 감각을 잃지 않는 어떤 힘이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마을을 나와 ‘안티브’로 길을 잡았다. 바람이며 하늘이 마치 가을날 같다. 시골길을 지나 시내로 접어들었다가 어느 철길 아래 굴다리를 지나니 왼쪽으로 자중해가 펼쳐진다. 오늘은 바람이 좀 있는지 파도가 요란하다. 파도가 뒤 흔들어 놓아서인지 해변 쪽의 비취색 바다가 안으로 훨씬 두꺼운 띠로 있다. 해안가로 캠핑카가 몇 대 세워져 있길래 그쪽으로 차를 몰아 해변으로 갔다. 양쪽 창을 열고 의자를 뒤로 젖혀 잠시 눈을 붙였다.
오늘 길에 공항에 들러 차를 반납했다. 홀가분함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이제 맘껏 걷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