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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철구 May 24. 2023

DAY19. 니스의 동쪽, 에즈빌리지

절벽 위 요새마을

아침에 눈을 뜨니 8시다. 늦잠이 자연스러워진 걸 보니 이 숙소도 적응이 된 것 같다. 주스를 한 잔 마시며 잠을 깨웠다.


에스프레소 내려 아이패드를 열고 이제는 점점 줄어들지만 밤 사이 쌓인 메시지를 읽는다.

퇴임을 하면 회사는 1~2년 정도 자문역 기간을 준다. 이도 저도 아닌 비무장지대 같은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OO회’라는 골프 모임이 있다. 자문역을 마치면 정식 퇴임임원 모임인 ‘OO Club’에 가입된다. OO회에서 5월 골프 모임을 안내하는 메시지가 와 있다. 익숙한 이름 한 명이 단체방을 나간 게 보인다. 물론 그분은 골프를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 메시지가 올 때마다 번거로워서 일 수 있으나, 문득 그 다운 ‘단절’이라 생각했다.




서두를 이유가 없으므로 지난주 포르투에서의 메모와 사진들을 정리하고 오늘 갈 <에즈 빌리지>와 멍뚱(Menton)에 대한 정보를 검색하고 어제의 오류를 감안해 ‘B Plan’까지 세우고 물과 바게트 빵을 백팩 옆에 꽂고 차를 몰아 동쪽으로 다시 갔다.


두 번째 오는 길이라고 한결 여유가 있다. 주변도 보이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도 들린다. 뱅글스의 ‘Eternal Flame’을 따라 부르며, 이 노래 가사를 적어줬던 대학생 때 어학연수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시골학교에서 만난 스페인의 '아나'라는 친구를 생각했다. 잘 살고 있겠지. 해안을 끼고 달리는 도로에서 본 지중해의 먼바다 쪽은 잔물결들이 햇볕에 부딪쳐 하얗게 반짝인다.


에즈 빌리지에 도착해서 주차가 여의치 않으면 바로 멍뚱으로 갈 생각이었는데 좀 이른 시간이라 주차장 진입이 가능했다. 빈자리가 없었지만 다른 차의 입출입이 문제 되지 않을 만한 곳에 평행주차를 했다.


에즈 빌리지는 중세시대 전쟁을 피해 온 주민들이 427미터 좁고 가파른 절벽에 겹겹이 집을 지어 요새처럼 만든 성벽 마을이다. 중세의 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고풍스러운 마을은 호텔 갤러리 아뜰리에와 식당으로 가득하다. ‘Prive access’로 막힌 곳들은 사람이 사는 곳 같다. 작은 골목길을 걷다 막다른 골목이다 싶으면 그 옆으로 계단으로 연결되어 미로처럼 또 다른 골목으로 이어진다.


성벽마을, 에즈빌리지


집들의 외부는 석회암 돌과 하얀 시멘트 벽이라 전체적으로 성벽처럼 보이지만 집집마다 돌의 크고 작음과 채우고 있는 시멘트의 양이 조금씩 달라 개성 있게 보인다. 어는 볕이 잘 드는 벽에는 커다란 선인장이 자라고 있다. 어떤 집은 대문 앞에 한아름의 로즈메리를 또 어떤 집은 회색 벽에 보라색 꽃으로 채우고 있다.


공방 한 곳에 들어가니 하얀 회벽을 바른 작고 아늑한 석굴 같다. 벽의 홈에 재떨이를 둔 곳도 있고, 어떤 집은 대문 앞에 재떨이를 매달아 놓고, 마을과 잘 어울리는 거리의 재떨이까지 신기하게 골목의 곳곳에 재떨이가 있다. 배려인지 깨끗함의 추구인지 모르겠다.


계속 이어지던 골목은 절벽 꼭대기의 열대정원이 있는 곳에서 끝난다. 선글라스를 꺼내 쓰고 배낭 한쪽의 바게트 빵을 꺼내 몇 점 뜯으며 입장 줄을 기다렸다.


열대정원에는 다양한 선인장과 다육식물, 그리고 이름 그대로 열대식물들이 가득하다. 정원 입구 쪽 잎이 넓은 선인장에 어떻게 새겼는지 낙서가 많다. 가만히 들여다봤는데 다행히 한국인이 쓴 것 같은 내용은 없다. 절벽의 정상에서 보이는 사방은 절경 그 자체다. 코발트색의 지중해가 해안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가 가까운 바다는 코발트색으로 먼바다는 하얗게 반짝인다. 수평선과 이어진 하늘은 더 뿌옇게 하얗다가 다시 파란 하늘로 펼쳐진다.


정상에서 내려다본 마을 한편에 노란색 성당과 시계탑이 있다. 이 희뿌연 성 같은 마을에 노란색 성당이라니, 위에서 내려다보니 내 빨간 차도 안전하게 주차되어 있다. 정상에는 ‘barbara’라는 이름의 조각상이 있다. 단발의 곱슬머리에 드레스를 입고 바람을 맞고 있는 이 사람의 사연이 궁금해졌다. 표정이 그리 슬퍼 보이지는 않다.

에즈빌리지 열대정원 정상의 'Barbara'


내려오는 길에 그 노란 시계탑이 있는 성당으로 갔다. 성당의 외부는 특별한 장식 없이 오래된 교회처럼 보이고 내부는 그것보다 더 낡았지만 우아하게 화려하다. 금장 장식이 과하지 않고 푸른빛이 도는 벽과 어울려 신비함을 더한다. 조용한 성가가 울려 퍼지고 창으로 들어온 빛이 성모상을 비춘다.


마을입구 카페에서 햄버거와 맥주 한 잔을 시켰다. 며칠 전부터 햄버거가 먹고 싶었다. 햄버거를 보니 장인어른이 생각난다. 햄버거를 좋아하셔서 삼우제 때 산소에 햄버거와 김밥을 차려 제사를 지냈다. 어떤 상황에 왜 아버님을 생각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가끔 장인어른을 추억한다. 주책맞게 눈물이 찔금 난다. 차가 아니라면 와인이나 맥주를 한잔 더 하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다.


‘모나코’는 그저께의 혼란스러웠던 기억과 카지노나 옛 궁전 하나 보러 가기엔 코스트가 너무 큰 것 같아 생략하고, 드라이브도 할 겸 바로 멍뚱으로 갔다. 차가 좀 막힌다. 아우디 차량 한 대가 비상차도 쪽으로 오더니 깜빡이도 없이 내 앞으로 끼어든다. 뒤에서 클락션이 울린다. 백미러를 보니 손가락을 들어 욕을 하고 있는데 끼어든 차는 이미 내 앞으로 갔는데 혹시 바보처럼 끼워 준 나를 욕하는 건지 알 수가 없다. 2월의 레몬 축제로 유명하다는 멍뚱의 도심은 산비탈에 성냥갑처럼 빡빡한 집들로 니스와는 또 다른 풍경이었다. 해안은 니스보다 조금 더 여유로웠고 바람이 훨씬 많았다.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마시고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내비게이션이 A8 유료도로로 안내했다. 줌인-줌아웃이 안 되는 내비게이션이라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오다 보니 유료도로 쪽이다. 얼른 무료 도료로 핸들을 돌렸다. 요금정산을 어찌하는지 모를뿐더러 뻥 뚫린 길을 달려 급하게 돌아가도 나를 맞아 줄 사람이 없다.


모나코에서 니스로 오는 3개의 길이 있는데 해발 50미터 정도의 지중해를 바로 옆으로 지나는 길이 있고, 중간도로는 해발 500미터 부근을 지나고, 그리고 가장 높은 곳의 도로는 넓게 닦여진 유료도로다. 특히, 해발 500미터 높이에서 지중해안과 절벽을 지나는 이 도로는 ‘모옌 코르니쉬 (Moyenne Corniche)’라고 세계적으로도 절경으로 유명한 곳이다.


‘모옌 코르니쉬’ 도로는 산의 형세에 따라 굽이치고 아래로는 낭떠러지가 있어 나도 모르게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도로 곳곳에 사고 기록인 듯한 페인트 자국이 있다. 미시령 옛길에 비할 바가 아니다. 저 멀리 굽이치는 절벽의 벼랑 끝에, 정말 끝에 걸쳐서 지은 하얀 건물이 있다. 그 옆을 지나며 보니 호텔이다. 독특함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건가?


에즈빌리지에서 내려다본 지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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