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스의 마지막날
니스에서 마지막 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로 정했다.
무목적적이고 가벼울 것이라 여겼던 여행이 그리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낯선 곳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는 게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기도 하고 이국의 풍경이며 사람들이며 많은 것들을 머리와 마음속에 차곡차곡 쟁여가는 일이 에너지가 보통 드는 일이 아니다. 남은 이탈리아에서의 일정은 로마에서 피렌체로 베니스로 다시 로마로 편치만은 않을 것 같아 지금쯤 충전의 시간이 필요할 것 같다.
오렌지 주스를 마시며 몸을 깨우고, 커피를 한 잔 내려 머리도 깨운다. 유튜브로 ‘니스에 어울리는 음악’을 검색해 프랑스 감성에 어울리는 샹송과 팝송을 선택했다. 어젯밤에 마시다 냅킨으로 잔을 덮어 두었던 남은 와인을 마신다. 바게트 빵도 몇 입 뜯어먹었지만 배고픈 채로 좀 두는 게 좋겠다 싶어 내려놓았다.
이따 배고플 즈음에 집 근처의 근현대미술관 앞의 식당 골목에서 지중해 음식과 와인을 한잔하고 볕이 잘 드는 찻집에서 커피 한 잔 하고 들어오려고 한다. 그리고 저녁엔 평판 좋은 피자집에서 피자와 맥주 한 잔 하는 게 좋겠다.
숙소에서 10분 거리에 근현대미술관이 있어 거기로 향했다. 미술관에 가까워 오니 갑자기 대포소리가 난다. 정오를 알리는 소리다. 옛날 스코틀랜드 귀족이 부인과 함께 니스를 왔는데 부인이 마실에 나가면 밥 때도 잊고 수다를 떨어서 그 귀족이 12시면 대포를 쏘아 아내에게 밥을 달라고 신호를 보냈던 게 지금도 이어져 12시면 대포소리 같은 축포를 쏜다. 니스에 와서 가이드에게 들은 덕에 별로 놀라지 않고 12신가 하면서 자연스럽게 시계를 봤다.
근현대미술관은 프랑스와 미국의 예술 작가들의 아방가르드(Avant-garde) 작품들을 많이 전시한다고 소개되어 있다. 가방을 맡기고 10유로를 내고 입장했다.
미술에 문외한이지만 몇 작품을 보다 문득 ‘시선이 예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늘 보던 것도 어떤 시선으로 보는 가에 따라 의미를 갖겠구나 생각을 하며 난해해 보이는 작품들 속에서 예술가가 어떤 의도와 시선을 가졌을까 상상하며 봤다.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우거진 숲에 나체의 남성이 숲을 애정하듯 보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빔프로젝트로 보여주는 방에선 ‘우리는 저렇게 진화되지 않았는데, 원숭이와 달리 숲 속의 벌레들로부터 우리를 지킬 수가 없을 텐데’라는 조금 뜬금없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3층에서 시작한 전시는 5층에서 끝나고 자연스레 옥상에서 니스의 뷰를 볼 수 있도록 동선이 이어져 있다. 건물 전체가 독특한 외형으로 4개의 전시관 빌딩이 서로 복도로 연결되어 있고, 옥상은 그 연결을 아치로 만들었다.
미술관을 나와 광장 바로 옆의 ‘Cafe de Turin’이라는 해산물 전문점에 진열해 둔 석화와 다른 수산물에 눈길이 머물렀다. 지중해식을 먹겠다는 처음의 계획은 잊고 별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홍합 마리니에르와 감자튀김과 그린 와인을 한 잔 시켰다. 홍합은 작지만 샛노란 게 자연산이 분명하다. 홍합의 신선함에 새우도 6마리를 추가로 시켰다. 같이 나온 빵에 버터를 바르고 그 위에 홍합 두 개를 올려서 마치 밥 위에 반찬 올려 먹듯이 먹었다.
충무로의 ‘인헌시장’ 느낌이 나는 작은 골목길로 들어서니 북적이는 사람으로 활기가 가득 차다. 골목에는 니스의 대표음식이라는 소카집, 일본 라멘집, 지중해 음식점, 터키 음식점 등 식당과 카페가 늘어서 있고 중간중간 아이스크림, 비누, 올리브, 향료, 와인, 기념품, 마트, 정육점 등 다양한 상점이 있다. 나중에 니스를 여행하는 사람에게 꼭 알려주고 싶은 골목이다. 와인을 한 병 사서 백 팩에 넣으니 어깨가 묵직하다. 카페에서 카푸치노 한 잔을 시켰다. 옆에 있는 아저씨에게 담배 한 대를 얻어 천천히 폈다. 말보로 레드가 이런 맛이었군.
니스의 마지막 밤이다. 짐을 싸다가 선글라스를 렌터카에 둔 채 반납한 것을 알았다. 이런 상황에 찾을 수 있는지 검색해 보니 별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게 중론이다. 자책하며, 항공권 체크인을 하다 보니 수화물을 보내기 위해서 추가로 결제를 해야 된다. 니스에서 로마까지 비행기 값이 120유로여서 싸다 했더니 수화물 하나 붙이는 데 65유로다. 조도가 낮으니 카드 번호가 잘 안 보인다. 휴대폰 플래시를 이용해 카드 번호를 봐 가며 인터넷으로 결제를 했다. 120유로짜리 티켓에 120유로로 비즈니스 업그레이드 하라고 메일이 엄청 오더니 다 이유가 있었구나 싶다. 남은 일은 내일 로마 공항에서 호텔까지의 이동을 어떻게 할지 경로를 확인하는 일이다. 여러 명을 같이 태우긴 하지만 우버 택시보다 싸게 공항에서 로마시내 호텔까지 픽업해 주는 택시를 찾아 예약하고 확약메일을 받고 나니 이제야 떠날 준비가 다 된 것 같다.
낮에 산 와인도 있지만 지금은 맥주가 이 홀가분함을 더 상쾌하게 해 줄 것 같다. 와인에 밀려 홀대받았던 맥주를 한 캔 했다. 그리고 맥주는 비행기에 태울 수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