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쑤시개 통 위에 세워진 도시
피렌체에 더 있고 싶은 유혹이 있었지만 이런저런 예약들 조정하는 게 번거로워 처음 계획한 대로 아침 일찍 베네치아행 고속열차를 탔다.
익숙하게 기차에 올라 캐리어를 짐칸에 놓고 자물쇠로 화물칸 지지대와 연결해서 잠그고 내 자리로 갔다. 좀 있으니 수레가 와서 쿠키와 커피를 준다. 빈속이었는데 쿠기의 달달함이 좋다. 기차는 볼로냐와 한 두 도시를 더 정차했다. 북부의 철길 인프라가 안 좋은 건지 로마-피렌체 구간보다 느리게 움직인다. 최대 시속이 200킬로를 넘지 않는다. 베네치아에 도착할 무렵엔 잠깐 창가로 비가 부딪혔다.
산타루치아 역사 밖으로 나오는 순간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초록 돔의 성당과 바로 그 앞으로 수로가 눈앞에 펼쳐진다. 아, 이래서 물의 도시라고 하는구나. 예술의 도시, 쾌락의 도시, 유럽인들의 여행 버킷리스트 중 하나, 은행과 카지노 등 수많은 최초를 만들어 온 곳 등의 수식어가 많은 아름다운 곳, 베니스에 왔다. 베니스는 베네치아의 영어식 발음인데 더 정겹게 들린다.
5세기 로마가 붕괴될 무렵 훈족을 피해 온 고대 로마인들이 섬과 바다가 만나는 곳에 집을 지어 살기 시작해 1,100년의 세월 동안 현재의 도시 모습으로 완성되었다고 한다.
자연섬과 이쑤시게 통 같은 인공섬이 118개, 그 섬 사이사이로 177개의 운하가 흐르고, 400여개의 다리로 섬들이 연결되어 베네치아가 된다.
설마 물 위에 도시를 건설했을까?
갯벌처럼 지반이 무른 곳에 말뚝을 박아 지반을 다지고 그 위에 건물을 지었으니
베니스는 이쑤시개 통 위에 만들어진 도시인 셈이다.
‘바포레토’라는 해상버스를 타고 숙소로 왔다.
숙소는 수녀원 건물을 복원해 만들었는데 층고가 높은 긴 복도가 종교시설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층고가 5미터가 넘는 좁은 방을 복층으로 만들어 위쪽에 침실과 책상이 있다. 어떤 인테리어도 없이 벽은 하얀 페인트로 칠해져 있고 책상도 하얗고 주방 가구도 하얗다. 거실과 침실까지 만질만질한 짙은 회색 시멘트 바닥인데 욕실은 나무 바닥이다. 무늬만 창문이라 생각했던 초록색 묵직한 창문을 여니 맞은편 건물의 창과 닿을 듯 가깝고 그 아래가 운하다.
숙소에서 나와 섬의 반대쪽 방향에 있는 산마크로 성당과 광장으로 갔다. 구글맵으로 길을 찾긴 했지만 굳이 그걸 보지 않아도 인파의 흐름에 따라 걷다 보면 산마르코 광장으로 이끌리듯 가게 된다. 여의도 2배 면적의 도시에 일 년에 삼천만 명 이상이 온다는데 노동절과 겹친 휴일이라 관광객들이 정말 많았다.
미로 같은 골목길을 걷다 보면 길이 없을 것 같은데 길이 있다.
길에는 차나 자전거가 없다. 지금은 대부분 1층이 상점으로 운영되지만 예전에는 습기 많은 1층은 선착장으로 연결된 창고로 사용되고 2층부터가 거주 공간이다. 집에 창문이 많은 건 건물의 무게를 줄이기 위해서란다. 마을 곳곳에 인공 정수기 우물이 있고, 빗물을 이용하기 위해 처마와 연결된 배수관이 집 내부로 연결되어 있다.
갯벌 위에 도시를 건설하고, 섬 위에 인공정수기와 빗물을 아껴 사용한 시설들에서 베니스 사람들의 삶에 대한 강한 의지가 느껴진다.
사람의 흐름을 따라 걷다 보면 어느 지점에서 두 갈래로 갈린다. 한쪽은 리알토다리, 또 다른 한쪽은 산마르크 광장 쪽이다. 나는 리알토다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리알토(Rialto) 다리' 주변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 주요 무대였다고 한다. 예전부터 상권의 중심지여서 낮이고 밤이고 활기차다. 주위의 기념품 상점에는 다양하게 멋을 부린 가면을 판다. 금욕적인 고난주간을 앞두고 카니발이 열리는 데, 가면은 살인과 방화 말고 모든 게 허용되었던 난장판 같은 쾌락을 상징한다.
삼각뿔의 지붕 달린 복도처럼 생긴 '리알토 다리’에서 바라보는 운하의 저녁 풍경이 운치 있다. 섬과 섬을 잇는 운하에 여유롭게 떠다니는 곤돌라, 운하의 양쪽에 불 켜진 식당들과 다양한 색깔의 건물들, 그 섬 끝자락의 커다란 성당의 돔과 석양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섬의 남쪽 산마르코 광장 주위에 볼 게 많다. 베네치아의 안주인이라 불리는 종탑, 커피가 처음으로 내려진 곳으로 카사노바가 다녔다는 카페, 이스탄불의 성소피아 성당을 본으로 해서 만들어진 비잔틴 양식의 화려한 산마르코 대성당, 두칼레 궁전과 그 옆 감옥으로 이어진 ‘탄식의 다리’, 광장 주위를 다양한 상점과 식당들도 볼거리다.
광장의 끝에는 98미터의 종탑이 있다. 동서양 만남의 장소였던 베네치아, 사람들이 베네치아에 도착하며 가장 먼저 보게 98미터의 종탑은 그 만남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서인지 벼락을 맞고 무너졌는데 인명피해가 없어 젠틀맨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그 자리에 예전 모습으로 다시 만들어져 있다.
두칼레 궁전 바로 옆 운하에 흰색 석조의 '탄식의 다리'가 있다. 두칼레 궁전 내 법원에서 판결을 받고 다리를 건너면 바로 감옥인데 감옥 내 온갖 종류의 고문으로 죄수들의 비명소리가 운하로 울려 퍼졌다는데, 그 다리를 건너는 죄수들의 절망적 탄식에서 이름을 따 '탄식의 다리'로 불린다. 그렇게 사진을 찍던 관광객들이 이곳에선 아무도 사진을 찍지 않는다.
탄식의 다리에서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해상버스 대신 어둑한 길을 걸어서 오는데, 구글맵이 지름길을 안내하는지 인적 없는 으슥한 좁은 골목길로만 이어진다. 막다른 길일 것 같은데 또 길이 이어진다.
베네치아는 처음 일정에는 없는 곳이었지만 마지막에 추가했었다.
1870년 이탈리아가 통일이 되기 전까지 피렌체와 베네치아, 밀라노 등이 개별 공국으로 있어 도시마다 특징이 뚜렷하니 가보라는 추천이 있었고, 또 베네치아가 물에 잠기기 전에 가야 한다는 말도 혹하게 했다.
실제는 일 년에 0.2mm 섬이 가라앉고 해수면이 0.2mm 높아지고 있지만, 조수간만으로 생기는 높낮이를 생각하면 과장이 심한 위협적 소구였다.
무리한 일정이었지만 오기를 잘했다.
자정이 가까워진 시각, 숙소의 테라스에서 맥주 한 병 마시며 긴 하루를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