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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진 Oct 18. 2021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2016년 5월 13일

고등학교 2학년 때 일이다. 그 해 봄 첫 학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첫 국어 수업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실에는 학기 초의 어수선함과 분주함이 가득했다. 전교 통합 최하위 '꼴찌'를 자랑하는 우리 반이었다. 열여덟, 늘 무언가 넘쳐나지만 분출하지 못한 남학생들이 모여 있었다. 학창 시절을 계절에 비유한다면, 우리는 봄바람처럼 들떠 있었다. 나는 제일 앞줄에 앉아있었는데 특별히 공부를 잘하거나 열심히 하는 학생은 아니었다. 다만 누구보다 가까이 마주한 국어 선생님의 첫인상을 똑똑히 기억한다. 지금까지 만났던 가장 무서운 분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첫 시간부터 벼락같은 호통을 내치셨다. 심술궂어 보이는 불콰한 얼굴,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경어체 말투. 알아듣기 힘든 억센 억양 등이 모두를 금방 겁먹게 만들었다. 여기서 기억에 선명하게 남는 장면이 하나 있다. 선생님은 칠판 가득 한시 한 구절을 적어놓으셨다. "자, 모두들 이 시를 외우도록 하십시오" 교실의 공기는 숨 막힐 것처럼 무거워졌다. 누구 하나 소리 내지 않았고 쥐 죽은 듯 고요했다. 우리는 포장을 뜯지 않은 노트를 펼치고 수백 번씩 글자를 옮겨 적었다. 이윽고 군인처럼 구호에 맞춰, 한 자씩 우렁찬 목소리로 합창하기 시작했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


소년은 늙기 쉬우나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일촌광음불가경(一寸光陰不可輕)


찰나의 시간도 가벼이 여기지 말지어다


미각지당춘초몽 (未覺池塘春草夢)


연못가 봄풀의 꿈이 깨기도 전에


계전오엽이추성(階前梧葉已秋聲)


계단 앞 오동잎은 가을 소리를 내는구나.


"여러분을 학생이라 부를 수 있는 시간은 금방 지나가버리고, 무언가를 이룰 수 있는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그렇게 인생의 가을을 맞이하지 마십시오" 물론 시의 뜻을 정말로 이해하고 외운 건 아니었다.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간신히 따라 부르는 것만으로도 벅찬 일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첫 수업에서 바짝 든 군기는 오래가지 않았다.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장난을 많이 치시는, '고구마'라는 별명을 가진 분이라는 걸 금방 알게 되었으니깐. 우리는 금방 문제의 ‘그 반’으로 돌아갔다. 그 시가 유명한 주자의 '권학문'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오랜 후의 일이다.


많은 날이 지나고 또다시 봄은 찾아왔다. 이제 서른이 된 친구들은 술자리마다 그날의 추억을 떠올리곤 했다. "나 그때 그 시 안 외우면 진짜 죽겠구나 싶더라고. 첫 시간부터 생명의 위협을 느꼈잖아" 한바탕 웃음이 지나가고 나면, 다시 익숙한 이야기들이 돌기 시작한다. 직장 이야기, 월급 이야기, 연애와 결혼 이야기... 그런 고민들만 남은 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어느 때처럼 출근해 격무에 시달리던 중, 회사 옥상에서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문득 계절이 바뀌어있었다는 게 느껴졌다. 거리에는 긴 겨울이 지나고, 만개했던 꽃들도 지고 있었다. 어른이 되는 시간은 생각보다 길지 않았던 거다.


얼마 전 오랜만에 찾은 고등학교에 선생님들은 이미 계시지 않았다. 다만 누군가 꼭 닮은 남학생들은 여전히 교정을 질주하고 있었다. 선생님은 알고 계셨을까. 혹 천 년 전 주자는 알고 있었을까. 삶의 매 순간 소년들이 흔들릴 때면, 그 시를 마주하게 된다고. 내가 입학하기 전부터 수백 년 그 자리를 지킨 학교 계단 아래 아름드리 벚꽃나무는 벌써 여름을 향해간다. 계절이 지는 소리에 가만히 외워본다. 소년이로학난성, 일촌광음불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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