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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규진 Oct 20. 2021

새로 산 기타

2018년 1월 28일

그 무렵 겨울, 새 기타를 샀다. 새로 온 악기는 참 멋지다. 스무 살 무렵부터 갖고 싶던 녀석이다. 당분간 소리는 나지 않을 것 같다. 나는 음악에는 소질이 없다. 그리고 일에 쫓기는 직장인이다. 연주를 하는 것보다 바라보는 시간이 더 많다. 집에는 먼지가 뽀얗게 앉은 기타들이 쌓여있다. 지난여름과 겨울을 겪느라 뒤틀어진 나뭇결은 아직도 거칠다.


그럼에도 또 새로운 악기가 늘어났다. 엉뚱하게도 입사 초년차의 어느 기억 때문이다. 그 시절 나는 구멍이었다. 매일 악몽을 꾸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날이었다. 퇴근길에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기타 가게에 달려간 적이 있다. 꿈에 그리던 체리색 할로우 기타를 놓고 한 시간을 고민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주인아저씨한테 이런저런 넋두리를 풀어놓다가 말이다. “아저씨 저 이렇게라도 하면 좀 나아질 수 있을까요?” 주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물론 갖고 싶던 기타를 산다고 뭔가 달라진 없었다. 그게 얼마나 비싼 악기든지, 얼마나 구하기 힘든 물건이든지 말이다. 보물처럼 곱게 모셔온 기타는 새 것인데, 한동안 오래된 나쁜 기억들이 박제된 것처럼 보였다. 소스라치게 놀랐을 땐 방 한편에 소리를 내지 않는 악기들이 가득한 뒤였다. 나는 무너진 자존감을 무엇으로 채우려 했나. 하지만 감정의 구멍을 채우려 하는 소비는 정답은 아니었다.


기억은 미화되지만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소용돌이치던 감정은 무뎌진다. 꽤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니 선명한 기억들은 흔적이 된다. 먹먹하고 답답했던 마음의 응어리는 풀렸던 것 같다. ‘그래, 그땐 그랬지’하고서 차마 놓지 못했던 것들을 놓는다. 비로소 연주해본 그 기타의 소리도 훌륭하게 익었던 것 같다. 마치 오래된 앨범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느낌처럼 열었다가 닫는다.


최근 몇 개월 동안 마음이 어지러운 일이 있었다. 하루 종일 생각에 빠져 멍한 날도 많았다. 기분이 태도가 되어 사람들에게 민낯을 드러낸 것 같다. 벌써 해가 바뀌었지만 나는 마음을 정리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릴 것 같다. 당분간 이 기억과 고민들을 여기에 가둬 놓아야겠다. ‘응, 이제는 괜찮아’라고 스스로 말할 수 있을 때. 그때쯤 이 앨범을, 이 새로운 기타를 꺼내서 한번 연주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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