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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생선장수 Oct 09. 2017

감성의 너울

이혼 후에 남겨진 것들 039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이런 것들을 우리는 감성이라 일컫는다. 그리고 그러한 마음의 상태로 하는 행동을 감정적인 행동이라고 평가 내린다.


너무나 기뻐서 술자리에서 카드를 긁기도 하고, 너무나 화가 나서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상대에 퍼붓기도 한다. 사람은 이렇게 생겨먹었다. 감성은 우리에게 주어진 축복이자 불행이다. 일을 잘되게 하기도 하고 그르치기도 한다.


지금 난 15층짜리 빌딩의 12층에 앉아서 이 글을 쓰고 있다. 이 순간 나는 이 건물이 갑자기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거나 적어도 무너질 것이라는 불안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므로 이렇게 평온히 앉아 글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이러한 확신이 과연 이성적인 판단의 결과일까?

건물이 갑자기 무너진 사례가 없지 않다. 그리고 최근 경상도 지역의 지진 사례 등을 볼 때 건물이 무너지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다. 더욱이 내가 건축 관련 전문지식을 가지고 이 건물의 설계나 건축감리보고서 등을 보고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나는 어떤 근거로 여기 앉아서 평온을 얻고 있을까?

실례는 더 들 수 있다. 길가는 사람에게 묻지마 폭행을 당한 사례가 종종 신문지상에 등장한다. 우리는 그러한 현실에서 종종 불안과 공포를 느끼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극악무도하며 우연적인 사건에 대하여 자신의 생활과 분리하여 행동한다. 그러므로 많은 사람들이 별다른 고민없이 길거리를 걸어 다니는 행위에 안정감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안정감 또한 이성적인 행동일까? 주변에 다니는 사람들의 관상을 보고  혹시 주머니에 흉기를 넣고 있음을 정확히 판단을 할 수 있기에 안정감을 가지는 것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성의 도움보다는 감성적 판단에 의존하는 경우가 훨씬 많다. 복잡하게 하나하나 사고하지 않고 직관적으로 그냥 그렇게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 감성적 판단과 행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바로 감정이다.



여러 심리학자나 정신분석학자들에게 감성의 본질을 물어보면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있다.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 그 사람에게 '어디를 가시오?'라고 묻는다.
말을 탄 사람은 퉁명스럽게 대답한다.
'내가 그걸 어찌 알겠소? 궁금하면 이 말에게 물어보시오'

이 이야기에서 말하는 바를 조금 쉽게 설명을 하자면, 말을 타고 있는 사람 전체를 사람이라고 본다면. 말은 감성을 의미라고 사람은 이성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대개의 경우 우리는 감성의 흐름대로 움직이며 간혹 이성이 이를 통제하려고 하지만 그것이 그리 쉽지 않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다.  


감성은 이렇듯 우리 삶의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감성적인 너울이 일기 시작하면 말이 미친 듯이 달리기 시작하고 아무리 마부가 채찍질을 하고 통제하려 해도 그것이 쉽지 않은 지경에 이르게 된다. 감성이 결국 사람의 행동을 지배하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므로... 감성은 믿을게 못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감성의 '변덕'은 종종 우리의 삶을 망치는 주범이 될 때가 있다.


감성을 믿지 말라는 말이 아니다. 감성의 변화(감정의 변덕)를 감내하라는 말이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욕구라는 말을 하기도 하지만 어쨋던 감성적인 영역이다. 그런 느낌을 믿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올곧이 변덕 없이 유지되는 감성을 잘 읽어 내고 시시각각 변하는 감정의 너울을 견뎌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감성의 너울에 자신을 맡기지 않도록 훌륭한 마부가 되기 위해 우리는 노력해야 한다. 그러한 노력은 감성과 이성의 밸런스를 가져올 수 있도록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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