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코치 Jan 24. 2022

'Keep Calm and Carry On'

“얘들아, 일어나 봐. 아버지가 이상하셔.”


내가 중학교 2학년이던 9월 어느 화요일 새벽, 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깨우셨다. 아버지가 의식이 없으셨다. 구급의료가 없던 때라 이웃 의대 교수님께 급히 연락 드렸고 그분이 오셔서 돌아가신 걸 확인했다. 그렇게 아버지는 마흔 두 살에 뇌혈관질환으로 돌아가셨다. 아침에 연락 받은 친척들이 달려왔다. 큰아버지들의 통곡 소리. 하루가 어떻게 지났는지 모른다.


저녁에 큰어머니가 나와 동생을 구석방으로 부르셨다. 밥상이 차려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저녁 이후에 제대로 먹은 것이 없었다. 밥을 보니 시장기가 몰려왔다. 국에 밥을 말아 허겁지겁 처넣으면서 기분이 묘했다.


아버지가 돌아 가셨는데 밥을 먹어도 되는 것인가? 아버지는 아직 병풍 뒤에 누워 계신데. 아버지가 돌아 가셔도 배는 고픈 거구나. 아버지가 안 계시다고 밥을 안 먹을 수는 없는 거구나. 배고픔과 울먹거림.


‘눈물 젖은 빵을 먹어 보지 않은 사람과는 인생을 논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 전에는 그냥 ‘고생해 보아야 인생을 안다’ 는 의미라고 생각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는데도 배가 고프고 밥을 먹을 수밖에 없구나 하고 생각했던 그날 이 말이 좀 다르게 다가왔다. 눈물이 날 처지에도 밥을 먹어야 하는 상황을 말하는 게 아닐까 하고. 일상이 무너지는 상황에서도 밥을 먹어야 하는 게 삶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에 내가 먹었던 밥이 눈물 젖은 빵이었다.


제 2차 세계대전 초기인 1940년에서 1941년에 영국 런던은 독일 공군의 공습에 시달렸다. 영국군의 허술한 방공망과 약세인 공군력을 뚫고 독일의 폭격기는 6개월이나 런던의 밤을 유린했다. 17세기 초에 지어진 홀란드 하우스(Holland House)라는 대저택에도 1940년 9월 27일 밤 10시간에 걸친 공습에서 22발의 포탄이 쏟아졌다. 공습 다음 날 어느 사진가가 홀란드 하우스에서 찍은 유명한 사진이 있다.


사진에는 다음 날 세 사람의 신사가 저택 내의 도서실에서 평화롭게 책을 찾고 있다. 사실 도서실이 아니라 도서실이 있던 자리라고 해야 할 것이다. 건물의 대부분이 크게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도서실도 지붕이 날아가 하늘이 보였고 테이블과 의자는 모두 부셔졌고 바닥에는 폭격의 잔해로 발을 딛기도 힘들었다. 그렇지만 운 좋게 도서실의 서가는 쓰러지지 않았고 책도 크게 다치지 않았다.

Holland House, Kensington, London 1940

그날 밤에도 독일군의 공습이 있지 않을까? 신사들은 다시 방공호에 숨어야 할지 모른다. 다시 공포가 몰려올 것이다. 그들은 그런 상황에서도 책을 읽고 싶었다. 생명이 위협 받는 상황에서도 책과 책에 담겨 있을 이야기가 생각났고 책 읽는 시간이 소중했다.


코로나 바이러스는 우리의 일상을 뒤흔들어 놓았다. 친구를 만날 수 없었다. 심지어 가족들과 식사도 할 수 없었다. 공공의 안전을 위해 참았다. 그 시간이 일 년이 지나 이 년이 넘어가니 이제는 인내심이 바닥을 보이는 기분이다.


일상(日常)은 평범하지만 사건은 일상적이지 않다. 그러나 사건은 일상을 포용한다. 사건과 역사는 일상 위에 놓여있기 때문이다. 혁명을 하고 전쟁을 하는 사람도 밥을 먹는다. 그들도 친구와 가족이 보고 싶고 사랑 얘기가 듣고 싶다. 그래서 총알이 날아다니는 중에도 편지를 쓰고 연애소설을 읽는다.


전쟁의 먹구름이 몰려오고 독일군의 대규모 공습이 예상되던 1939년에 영국 정부는 국민들의 사기를 올리기 위해 포스터를 만들었다. 빨간 바탕에 ‘Keep Calm and Carry On’ 이라는 문구만 들어갔다. ‘침착하게 하던 일을 계속하라.’는 뜻이다. 영국인들이 힘든 상황에서도 꿋꿋하게 평정을 유지하면서 전쟁에서 승리한 저변에는 이런 마음가짐이 있었을 것이다.


일상은 매일 하던 일을 계속 하는 것이다. 일상이란 먹고 마시고 어울리고 즐거운 일을 찾는 일이다. 심각하고 힘들고 처절하고 운명적인 일에도 일상이 스며들어 있다. 물론 일상이 우리를 힘들게 할 때도 있다. 그렇지만 일상은 우리를 견디게 해 준다. 일상이 있어야 견딜 수 있다.


코로나 이전처럼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그냥 안부만 전하지 말고 길게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만나지는 못해도 전화든 카톡이든 화상이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어느 친구가 딸을 시집 보낸다는 얘기, 다른 친구는 회사를 그만 두었다는 얘기를 나눌 것이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는 빼고. (*)


작가의 이전글 마스크 이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