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코치 Apr 12. 2022

나는 책상입니다: 경영자의 일하는 방법

나는 책상입니다.


박 대표님이 제 주인이었습니다. 박 대표는 대표가 되면서 사무실 가구를 새로 들였습니다. 저도 그때 책상의자, 책장, 회의테이블, 회의의자와 같이 회사에 들어왔습니다. 우리 대표실 가구들은 대표님의 일과를 모두 보고 듣습니다. 특히 저는 대표와 가장 가까이 있어서인지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잘 압니다.


승진 후에 박 대표의 하루는 회의와 보고로 꽉 차있었습니다. 그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거 같았습니다. 출근 후에 커피 한 잔 마시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임원이나 팀장과 회의 중입니다. 혼자 있는 시간이 거의 없습니다.


박 대표는 종일 회의를 하다가 오후 5시쯤 되면 축 늘어집니다. 의자를 뒤로 젖히고 다리를 제 머리 위에 올립니다. (제가 이 양반의 습관 중에서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점입니다) 몸도 지쳤지만 머리도 잘 돌아가지 않는 거 같아 보였습니다. 박 대표의 다리 무게가 무겁기도 했지만 그가 지쳐서 탈진할까봐 걱정이 되었습니다.


CEO가 바쁜 게 당연하다지만 박 대표가 특별히 바쁜 이유가 있었습니다. 우리 회사는 규모에 비해 사업부가 많습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 일이 없는 거지요. 무엇보다 그를 바쁘게 하는 것은 그의 일하는 방법인 거 같았습니다. 사람이 꼼꼼한 걸 넘어 쫀쫀해서 온갖 거 다 챙겨 봅니다. 부서도 많은데 그렇게 챙기니 안 바쁘면 이상한 거지요.


그런 대표가 안쓰러웠는지 한번은 비서인 C대리가 그러더군요. “대표님, 그렇게 힘드셔서 어떻게 하세요. 회의를 좀 줄여 보세요.” 박 대표가 눈을 반쯤 감고 그러더군요.


“CEO는 혼자 일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직원들과 같이 일하니 회의가 많은 건 당연하죠.” 말은 참 그럴 듯합니다.


대표가 되고 일 년쯤 되었을 때 박 대표는 경영자 코칭을 받았습니다. K코치님은 글로벌 회사에서 사장을 지낸 분이었습니다. 지금도 박 대표가 처음 코칭을 받던 시간이 기억납니다. K코치가 박 대표에게 첫 질문을 던졌습니다.


“대표님, 리더는 어떻게 일해야 합니까?”


“리더는 뭐... 직원들을 이끌어야 합니다. 비전을 제시해야 하구요. 자신이 직접 일하기보다 직원들이 잘 일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박 대표가 자신 없이 중얼중얼하더군요. K코치는 미소를 짓더니 화이트보드에 문장 하나를 썼습니다.


“Leaders are those who make it happen through other people.” (리더는 다른 사람을 통해 성과를 내는 사람이다)


책상이 영어도 읽을 줄 아느냐고 놀라시네요. 대표님이 제 위에 올려놓은 영어 자료를 퇴근 후에 읽어 버릇해서 독해는 좀 합니다. ㅋㅋㅋㅋ...


아무튼 박 대표는 K코치의 말이 인상 깊었는지 코칭이 끝난 후에 이 문장을 수첩에 적어 놓고 수시로 중얼거렸습니다. 그의 일하는 방법이 달라지기 시작한 것은 그 이후부터였던 거 같습니다.


전에 박 대표는 보고하러 온 사람의 설명을 듣는 둥 마는 둥 바로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했습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 보면 될 거 같은데...’ 그리고 바로 보고자에게 ‘어떻게 생각합니까?’ 하고 의견을 물어 봅니다. 사장이 부하에게 그렇게 묻는 게 어디 질문인가요? 그냥 그대로 하라는 얘기지요.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코칭 이후에는 보고 받으면서 부하의 설명을 끝까지 아무 말 없이 들으려고 하더군요. 부하의 말을 다 듣고 차분한 목소리로 이렇게 묻는 일이 잦아졌습니다. “왜 그렇게 생각합니까?” 그러고 나서 부하의 생각이 옳은 거 같으니 그대로 하자고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부하의 생각이 일치할 때 그러더군요. 자기 생각을 굳이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의사결정을 부하의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고 할까요.


전에는 결국 부하 의견대로 결정할 사안도 온갖 거 다시 다 물어보고 거기에 자기 ‘라떼’ 얘기도 늘어놓았거든요. 박 대표는 임원으로 입사하기 전에 직장을 어찌나 많이 옮겼는지 여기저기서 들은 게 웬만큼 많아야지요.


사실 부하의 설명을 끝까지 듣는 것도 엄청 노력이 필요합니다. 박 대표가 보고를 받으면서 속으로 ‘저런 앞뒤 안 맞는 얘기를...’, 또는 ‘다른 부서는 어떻게 되든 지들 생각만 하네...’ 하고 한탄하면서 듣는 걸 저는 압니다. 전에는 못 참고 중간에 한 마디 하더니 코칭 이후에는 꾹꾹 참는 걸 보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코칭 이후 박 대표에게 또 다른 변화가 있었습니다. 부하의 의견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면 질문을 엄청 던졌습니다. 이런 관점 또는 저런 시각으로 사안을 보았는지 물어봅니다. 대표 자신이 생각하지 못했던 점까지 부하가 고민한 경우에는 (윗분에게 할 말을 아니지만) 기특하게도 자신의 생각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런데 대개 이렇게 질문을 퍼부으면 부하들은 ‘우리 대표님은 정말 예리하시고 전략적이야. 생각도 못한 걸 물어보신다니까’ 하고 생각합니다. 박 대표도 사안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거나 배경 지식이 없는 경우도 많습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대책이 없을 때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부하들은 박 대표가 다 알면서 질문한다고 착각하는 거지요. 정말 몰라서 그런 건데 말입니다. 사실 임원이나 대표도 모르면서 아는 척 하는 거 투성이입니다. 이건 우리 임원 책상들만 아는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코칭 후에 일하는 방법이 이렇게 바뀌니 말도 줄고 회의도 짧아져서 박 대표도 덜 힘들어 하는 거 같았습니다. 회의가 없을 때는 음악도 틀어 놓고 못 읽은 자료도 보고 저한테 발을 올리고 낮잠을 자기도 했습니다. (사실 박 대표는 점심식사 후에는 꼭 일이십 분씩 낮잠을 잡니다.)


임원과 팀장들의 얼굴도 밝아졌습니다. 과거와 달리 대표가 자신들의 의견을 존중해 준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경우에도 질문과 토의를 통해 대표와 의논할 수 있게 되었으니까요. C비서도 비서실에서 보고시간을 기다리는 관리자들의 목소리가 켜져서 일을 할 수가 없다고 대표에게 불평을 합니다.


박 대표는 5년 간 대표로 일한 후 퇴임했습니다. 지금 저는 박 대표의 후임인 A대표와 일하고 있습니다. A대표는 박 대표와 대학 때부터 친한 친구입니다. 퇴임하고 몇 달 만인 어제 박 대표가 회사에 들렀습니다. 지나다가 차 한 잔 하러 오셨다더군요. 오랜 만에 뵈니 정말 반가웠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박 대표도 경영자 코치가 되었네요.


두 분이 친구라서 그런지 사실 A대표도 박 대표 만만치 않게 꼼꼼(쫀쫀)하고 일 욕심이 많습니다. 어제도 회의가 7개나 있었습니다. 책상인 제가 보기에도 A대표님도 코칭이 필요합니다. K코치님을 다시 모셔도 좋겠지만 박 대표, 아니 이제 박 코치를 모셔서 A대표를 코칭해야 할 거 같습니다. 저와 같이 일하는 대표님들은 모두 왜 그럴까요? ㅎㅎㅎㅎㅎ (*)



작가의 이전글 마지막 출근을 생각하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