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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용 Aug 17. 2022

해준과 서래의 속마음... 엇갈린 결심

어떤 사랑은 결심이 필요하다

*영화 <헤어질 결심>의 주인공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의 속마음을 편지 형식으로 재구성 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영화를 감상한 분들만 보시길 추천합니다.


서래 씨. 우리의 이야기에는 멜로와 로맨스 뒤에 서스펜스가 따라붙지만, 이는 윤활유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함께 하며 느꼈던 감정은 박찬욱 감독님이 설정한 상황이 아니더라도, '보통의 사랑'과 '보통의 이별'에서 '보통의 사람'들이 느끼는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불면증에 시달리는 형사와 중국에서 밀입국한 간병인'은 보통의 사랑과 이별을 조금 더 세련되게, 극적으로 표현하기 위한 소재일 뿐이겠지요.


이제와 알게 됐지만, 슬프게도 사랑에는 의심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사랑은 상대를 온전히 믿고, 모든 것을 주는 희생'이라는, 세상에 떠도는 아름다운 '말'에 잠시 잊고 있었을 뿐입니다. 우리 주변에선 이미 사랑할수록 의심도 커지는 연인의 사례를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으니까요. 사랑의 시작은 결심이 필요 없지만, 상대에 대한 의심이 솟구치는 상황에서도 상대를 온전히 믿기(사랑하기) 위해서는 용기, 결심이 필요합니다. 저는 그 결심을 돌아서는 데 사용했을 뿐입니다."서래 씨는 피의자예요. 피의자는 경찰이 범죄 혐의를 의심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나는 경찰, 서래 씨는 피의자입니다"라고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짰던 제 모습에도 서래 씨에 대한 사랑이 담겨있다고 느껴지는 이유입니다. 제가 정말 궁금했던, 아니 의심했던 것은 서래 씨의 범죄 혐의가 아니라, 정말 나를 이용했을 뿐, 사랑하지는 않았는지 확인하고픈 서래 씨의 마음이었겠지요.  


제가 사랑을 고백하기 직전까지도 서래 씨는 저를 믿지 못했지요. 제 감정이 정점에 닿았던 그 순간의 제 목소리는 서래 씨의 스마트폰에 녹음돼 있습니다. 서래 씨는 그날 밤 서래 씨의 집을 나서는 제 모습에서 '헤어질 결심'을 느겠지만, 사실 그건 '서래 씨가 날 사랑하지 않았던 것 같다'는, 당장의 분노가 섞인 도피성 결심이었습니다. 결심했다고 잊을 수 있다면 누가 사랑을 어렵다고 할까요. 왜 상대에게 이별을 통보받은 이들이 상대가 날 진심으로 사랑했는지부터 궁금해할까요. 그날 밤 '헤어질 결심' 이후에도 저는 서래 씨가 저를 진심으로 사랑했을 일말의 가능성을 놓지 못했습니다. 서래 씨를 향한 제 분노와 의심은 역설적으로 서래 씨를 온전히 믿고(사랑하고) 싶기 때문이었습니다.


서래 씨가 저를 사랑했다고, 사랑한다고 믿고 싶지만, 믿을 수 없는 저는 '헤어질 결심' 이후에도 감정의 나침반 제자리만 돌고 있니다. 그래서 저는 "왜 난 그런 남자들과 결혼할(했을) 까요. 해준 씨 같은 바람직한 남자들은 나와 결혼해주지 않으니까. 얼굴 보고 한 마디라도 하려면 살인사건이라도 일어나야 하죠"라고 말했던 서래 씨에게 긍정도 부정도 아닌 '질문형 답변'을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 농담할 때입니까?"라고요. "나는 완전히 붕괴됐"다는 제 말에서 이미 사랑을 확인했던 서래 씨는 이 대화를 통해 마지막 남은 의심마저 해소했겠지요. '남편이 살해당한 그런 상황으로 엮이지 않았더라도 이 남자가 나를 사랑했을까'라는 의문 말입니다. 서래 씨는 제게 본인이 '이포에 온 이유'가 중요하냐고 물었지만, 이미 사랑이 깊어진 이상, 이제는 서래 씨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제게는 저 질문 또한 큰 의미가 없었습니다.


세상과 이별한 이유는 제게 미결 사건으로 남고 싶은 마음 말고도 당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서이기도 했지요? 보통의 사랑과 이별을 경험한 이들이라면 영화에 집중하지 않아도 충분히 와닿을 정도로 보편적 감정이겠지요. 사랑했던 상대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다는 마음은 누구나 한 번쯤 가져봤을 테니까요. 이별 후에 밀려오는 고통은 더 이상 상대를 볼 수 없다는 허전함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요. 내가 '아무 사람'도 아니게 되는 것. 잊힘에 대한 두려움이 마음을 잠식하니까요.


당신을 향한 제 마음을 확인하는 과정도 '보통의 사랑'에서 남들이 겪게 되는 감정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품위는 자부심에서 나온"다며 눈을 부릅떴던 저는, 서래 씨의 마지막 위치가 기록된 해변에서 결국, 그 자부심과 품위마저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장은 그녀를 찾는데만 집중하는, 그 외 모든 감정과 상황은 머릿속에서 배제되는 한 남자만 있었습니다. 밀려오는 파도에 균형을 잃고 쓰러지면서까지 애타게 서래 씨를 찾았던 저는 그야 비로소 당신을 온전히 사랑하게 됐습니다. 당신에 대한 의심도, 제 자신에 대한 질책도 그 해변에는 없었습니다. 오로지 당신을 찾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당신처럼 저도 당신이 '헤어질 결심'을 한 뒤에야 제 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해준 씨. 해준 씨가 생각한 대로 저는 해준 씨를 처음부터 믿은 것은 아니었습니다. 우여곡절 많았던 제 삶이 변명이 될 수는 없겠지만, 해준 씨가 입었을 마음의 상처를 조금이나마 아물게 하기 위해서는 그런 변명이라도 꺼내야겠지요.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순간, 당신의 사랑이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나는 순간, 내 사랑이 시작됐다는 제 독백에서는, 그 흔하디 흔한 '사랑은 타이밍'이라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당신이 "나는 완전히 붕괴됐"다는 말로 제게 사랑을 고백하고, 제 집을 나서는 순간, 제 눈에 당신은 '헤어질 결심'을 한 남자였습니다. 실제로 약 1년이 흐른 뒤, 이포의 한 시장에서 저와 마주친 당신은 제 두 번째 남편이 살해당하자, 첫 사건과는 달리, 저를 용의자로만 보려고 노력하더군요. 의심을 거두는 순간, 저를 향한 사랑이 시작됐던 당신은 '헤어질 결심'을 한 뒤에는 저를 의심하지 않고서는 감정을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된 것 같았습니다. 이후, 제가 당신에게 "그날 밤 시장에서 우연히 나와 만났을 때, 당신은 문득 다시 사는 것 같았죠"라고 물었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당신이 거친 언어로 사랑을 고백하기 직전까지도 저는 당신의 마음을, 당신을 향한 제 감정을 확실히 알 수 없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신이 '헤어질 결심'을 한 뒤에야 그것들을 확인할 수 있었죠. '그날 밤 시장'에서 만난 뒤부터 저는 첫 만남에서 당신이 제게 그랬듯 당신을 멀리서 지켜봤습니다. 당신이 제게 베풀었던 호의를 저는 베풀 수 없는 상황지만, 당신이 궁금하고 걱정됐습니다. 면도는 했는지, 왜 운동화를 신지 않고 구두를 신었는지, 잠은 제대로 자는지 궁금했습니다. 물론, 당신이 잘 살고 있었으면 하면서도 한편에는 막상 잘 살고 있었다면 서운해했을 것 같은 이중적인 마음이 공존하고 있긴 했지요.


그래도 저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세요. 경찰서 취조실에서 당신과 함께한 추억, 그 생선초밥을 혼자 먹으면서 녹음된 당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은 제 몫이었습니다. 차마 깊은 바다에, 누구도 찾지 못할 바다에 그 전화기를 던져버릴 수 없던 이유입니다.


남녀의 사랑이 동시에 시작해 비슷한 시기에 1g도 오차 없이 비슷한 크기의 감정을 공유하고 헤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지만 우리 주변의 '보통의 사랑'은 아쉽게도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상대가 마음을 접은 것 같은데, 저는 이제 그(그녀)가 너무 좋아졌"다는 후회 섞인 고민은 중국이든, 한국이든, 만국 공통으로 연애상담에서 빠지지 않는 단골 소재니까요.


저는 우리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처럼 극적인 상황이 아니더라도 당신이 절 사랑했을지 생각해 본 적이 있지만,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있습니다. 흔히 '사랑은 말해야 알 수 있다'고들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복잡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었던 우리의 '다름'이 사랑을 더 깊어지게 만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입니다. 만약 저와 해준 씨가 같은 중국인이었다면 저는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공자님 말씀에"라느니, 사랑의 본질과는 거리가 먼 얘기들만 해준 씨에게 들려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이 붕괴됐다고 했을 때, 당신이 절 떠나고 나서야 '붕괴'라는 단어를 검색했기 때문에 더 큰 마음의 후폭풍이 있었던 것도 그런 이유겠지요.


제가 당신의 품위를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인 것 같습니다. 술기운을 빌렸지만 밀려오는 파도가 두려운 건 마찬가지네요. 당신은 저를 찾으려 이 해변을 언제까지 헤맬까요. 부디, 너무 늦지 않게 귀가하시길. 그리고 오늘 밤은 제 숨소리를 기억하며 편히 잠드시길. 저는 당신을 사랑했습니다. 너무 늦게 알았을 뿐.


한 줄 소감 : 멜로가 이렇게 재밌는 장르였던가... 멜로를 만만하게 생각했던 내가 그렇게 나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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