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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용 Aug 18. 2022

리뷰는 이미 썼지만.. 더 얘기하고픈 헤어질 결심  

파도처럼 덮치는 사랑의 여운

오늘은 6월 개봉한 박찬욱 감독의 신작 '헤어질 결심'에 대해 얘기하고 싶어서 노트북을 열었습니다. 제 브런치 매거진 '명작과 평작을 가 시선'에는 이미 주인공 해준(박해일)과 서래(탕웨이)의 마음을 편지글 형식으로 작성한 리뷰가 있긴 합니다만, 여운이 가시지 않아 한 번 더 글을 쓰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글은 영화에 대한 평가와 상관없이, 그냥 '아직도 남아있는 하고 싶은 말' 정도로 편하게 봐주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워낙 여운이 큰 작품이라 두 번이나 글을 쓰게 되네요. 제 마음속에서 <헤어 결심>은 박찬욱 감독의 최고작이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멜로 영화를 선호하지 않습니다. '영화관에서 봐야 할 영화'로 분류하지도 않는데요. 꼭 대형 스크린과 스피커가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장르가 아니기 때문이기도 하고, 보통 멜로·로맨스 장르의 영화가 품고 있는 특유의 분위기를 고려해도 극장보다는 집에서 감상하는 게 집중에 더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훌륭한 영화는 장르를 가리지 않는다'는 말이 있지만, 이 말이 진심으로 와닿은 건 '헤어 결심'이 처음입니다. 물론, 이번에도 집에서 감상했지만 극장에서 봤어도 후회 을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영화 중경삼림(1995)으로 유명한 왕가위 감독은 '좋은 영화'의 기준으로 "영화가 끝나도 생각할 무언가를 남기는 영화"라는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제게는 '헤어 결심'도 그런 영화 중 하나인데요. 리뷰에서 이미 밝혔지만, '불면증이 심한 형사와 중국에서 밀입국한 간병인'은 그들의 사랑을 조금 더 세련되게,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한 소재일 뿐입니다. '흔치 않은 상황'에서 벌어지는 '특별한 사랑'으로 보일 수 있겠지만, '헤어 결심'에서 두 남녀가 겪는 감정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랑하면서 겪는 보통의 감정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과 상대, 둘 중 누가 더 사랑하는지 궁금했던 적이 있을 테고, 상대에게 영원히 기억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겠지요. 상대가 아무리 사랑한다고 말해도 이게 진심인지 불안했던 적도 있었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내가 상대에게 했던 모든 언행이 '사랑'인 줄 몰랐고, 상대가 내게 했던 모든 언행이 '사랑'인 줄도 모르고 있다가 무심코 지나버린, 돌이킬 수 없는 시간도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헤어 결심'은 이런 보통의 감정들을 조금 더 극적으로, 세련되게 연출했을 뿐입니다.

어느 시점부터 서래는 해준보다 먼저 알게 됐습니다. 자신과 해준이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요. 서래가 이를 더욱 확실하게 인지한 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해준이 '헤어질 결심'을 했던 시점인데요. 아마 이때까지 해준은 본인이 서래에게 어느 정도 '호감이 있다'는 정도로만 생각했을 겁니다. 서래 역시 '이 남자가 있어 든든하다', '날 지켜주는 기분이 든다', '이 남자와 있으면 마음이 편하다' 정도의 감정이었을 거라 생각됩니다. 그러다 해준은 서래의 범죄 혐의를 밝혀내고, 서래가 자신을 이용했다는 생각에 분노하게 되죠. 물론, 분노보다 '그녀는 진심이 아니었다'는 실망감이 더 컸을 거라 생각합니다. 서래를 온전히 사랑할 수도, 그렇다고 체포할 수도 없는 해준은 '헤어질 결심'을 하죠. 그때 해준이 헤어짐을 통보하는 말에는 역설적으로 '사랑'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서래는 알았지만, 해준만 모를 뿐입니다. 사실 따져보면 그들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해준이 '헤어질 결심'을 밝힐 때까지 그들이 함께한 시간에는 모두 사랑이 담겨 있었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점점 사랑으로 향하는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함께 생선초밥을 먹고, 사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볶음밥을 만들어주고, 잠을 재워주고, 사진에 대해 얘기하고... 해준은 직업 특성상 함께 하는 것이라고(일 때문이라고) 애써 부정했겠지만, 사실 서래와 함께한 그 모든 (보통의) 시간들은 사랑이었을 겁니다.

제 눈에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드는 사람도 있는 거야"라는 해준의 대사는 해준과 서래의 사랑을 암시한 복선이기도 합니다. 결과적으로 서래에게 해준은 물에 잉크가 퍼지듯이 서서히 물든 사랑이었지만, 해준에게 서래는 파도처럼 덮치는 사랑이 됩니다. 실제로 해준에게 사랑이 파도처럼 덮치는 결정적 순간에, 해준이 서래를 애타게 찾아 헤매는 그 해변에서 실제 파도가 해준을 덮치기도 하죠. 박찬욱 감독이 의도한 메타포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요. 


그동안 나눈 감정과 시간들이 사랑이라는 걸 확실히 인지하게 된 서래는 그 감정을 정리할 시간적 여유가 있었지만, 해준은 아니었습니다. 해준은 서래의 마지막 위치가 기록된 해변에서 그 모든 '사랑'을 갑자기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 던져집니다. 개인적으로 박찬욱 감독이 해준에게 너무 잔인하다고 느껴졌던 장면이자, 이 영화에서 가장 마음을 울리는 장면입니다. "내 품위는 자부심에서 나온다"고 했던 해준은 그 해변에서 넥타이를 풀어 던지고 운동화 끈을 질끈 동여맵니다. 여기서 넥타이는 해준이 서래에 대한 감정보다 더 중요하다고 (본인만 그렇게) 생각했던 형사로서의 품위, 자부심, 사회적 체면이 담겨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또한 실제로 박찬욱 감독이 넥타이를 메타포로 사용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습니다. 어찌 보면 '그런 것들'때문에 서래와 '헤어질 결심'을 했던 해준이 자신의 감정과 서래의 감정을 모두 깨닫고 나서야 진정한 사랑이 시작된다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 해변에서 후배 형사에게 전화를 걸어 "거의 만조야! 데려올 수 있는 애들 다 데리고 와! 빨리 찾으면 찾을 수 있어!"라고 절규하던 해준의 모습에는 너무 늦게 사랑을 알게 된 괴로움과 후회가 넘치도록 담겨 있습니다.


해준은 몰랐습니다. 서래에게 했던 말, 서래에게 했던 행동들이 모두 사랑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녀가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도 몰랐습니다. 이런 '안타까운 시간'은 보통의 사람들이 겪는 보통의 사랑에도 있겠지요. 우리는 지금도 '어떤 사랑'을, 사랑보다 중요하지 않은 그 '어떤 것들' 때문에 애써 부정하거나 외면하면서 살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이와 비슷했던 과거의 기억 때문에 아련해지지는 않지 생각하게 하는 영화입니다. 제게 왕가위 감독의 말처럼 '생각할 무언가'를 남겨준 영화. '헤어질 결심'에 대한  번째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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